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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도굴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문화재들···언제까지 개인이 사비로 사들어야 하나?


반출 사연 담은 신라 토기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정인성 교수가 공개한 신라 토기는 원형 그대로 보존이 잘 된 '굽다리 긴목항아리'로 신라 고분에서 부장품으로 자주 발견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토기를 소유하고 있던 '시게지로(重治郞)'라는 사람이 쓴 설명 판도 함께였습니다.

설명 판에는 "군함 후루타카로 조선 동해안을 순항 중 대정(大正, 다이쇼) 15년(1926년) 9월 21일 다카마쓰노미야(高松宮) 전하를 호종하여(모시고) 신라의 구도 경주 견학을 할 때 경주박물관으로부터 받은 물폼으로서 유서 깊은 고귀한 고분에서 발굴된 경질토기인데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에 사용된 것이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설명 판의 글은 1926년 9월 23일 발간된 매일신보의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1926년 5월 중순부터 11월에 걸쳐 50여 기의 고분을 발굴한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이끄는 조사단도 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 터의 설명 판에는 다카마쓰노미야가 발굴 현장을 방문했음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당시 조선의 문화재는 조선총독부의 법에 따라 이런 식으로 선물을 하거나 사고파는 것이 금지돼 있었습니다.


도굴범의 자필 고백
1926년 당시 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의 분관장을 맡고 있던 사람은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 설명 판에는 누가 누구에게 줬다는 기록은 없지만 당시 경주박물관장인 모로가가 직접 주었거나 적어도 그의 허락이 없이는 '고귀한'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을 줄 수 없었을 겁니다.

모로가는 1908년 조선으로 건너와 무역업을 하던 인물로 1910년부터 경주에서 사실상 도굴을 통한 유물을 수집했는데, 도굴 등의 행위가 너무 심해 결국은 법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정인성 교수는 모로가의 자필 편지도 한 통 공개했습니다.

모로가가 당시 조선의 유력자이자 조선총독부 박물관 심의위원인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에게 보낸 것으로 사천왕사에서 도굴한 녹유신장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신이 '호메이(호미)'로 땅을 파고 아이들을 시켜 땅을 파다가 녹유신장상을 발견했으며 이를 찍은 사진을 동봉하니 고고학회지에 실으면 어떻겠냐는 내용입니다.

편지를 쓰기 이전에 사천왕사의 녹유신장상 가운데 하나를 아유가이에게 선물한 모로가는 다른 하나의 녹유신장상을 학회지에 실어달라는 겁니다.

일본의 유수 고고학 저널에 녹유신장상을 실으면 자기가 가진 유물의 값어치도 올라가겠지만, 도굴에 대한 면죄부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편지를 썼지만, 도굴을 자백하고 사사로이 선물하거나 사고팔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반출 문화재에 대한 시각
영남대학교 정인성 교수가 공개한 신라 토기와 모로 가 자필 편지는 당시 고위공직자의 도굴과 문화재 매매를 입증하는,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겁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유물 모두 정인성 교수가 사비로 사들인 겁니다.

신라 토기는 일본의 경매 사이트에서, 모로 가의 편지는 일본의 헌책방에서.

정 교수 이외에도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런 식으로 사료들을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씩 들여가며 사비로 사 모으고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역사나 고고학 교수나 이런 분야에 연구 또는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 월급 받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해외 반출된 문화재를 보면 어떻게 해서든 국내로 가지고 들어오고 싶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움이 많다고 합니다.

아무런 현실적 보상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월급 아껴서 수백, 수천만 원씩 돈을 쓰기가 힘든 것이죠.

정부가 문화재 환수에 직접 나설 경우, 우리 문화재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까지는 기대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학자들이 사 모으는데 든 경비라도 지원하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개인 소유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화재로 만드는 동시에 우리 역사를 세우는 데 보탬이 되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김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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