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 판 붙은 신라 토기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정인성 교수는 지난봄에 일본 옥션에서 신라 토기를 하나 샀습니다.
구입한 토기는 원형 그대로 보존이 잘 된 '굽다리 긴목항아리'였고 신라 고분에서 부장품으로 발견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토기에는 설명 판이 하나 붙어 있었는데, 이 토기를 소유하고 있던 '시게지로(重治郞)'라는 사람이 쓴 것이었습니다.
설명 판에는 "군함 후루타카로 조선 동해안을 순항 중 대정(大正, 다이쇼) 15년(1926년) 9월 21일 다카마쓰노미야(高松宮) 전하를 호종하여(모시고) 신라의 구도 경주 견학을 할 때 경주박물관으로부터 받은 물품으로써 유서 깊은 고귀한 고분에서 발굴된 경질토기인데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에 사용된 것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1926년 9월 23일 발간된 매일신보의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천년고도 경주에 다카마쓰노미야(高松宮)전하 일행 도착하심'이라는 기사에는 "제2함대(군함 후루타카)는 21일 오전 9시 50분부터 동 21시까지 경북 포항에 입항하였고 다카마쓰노미야(高松宮) 전하는 오후 1시 20분 포항에 상륙하여 자동차로 경주로 향하여 2시 15분 경주박물관에 도착하여 고적에 관한 설명을 청취하신 후 박군수 외 7명을 사알(賜謁, 만남) 하시고 기념식수를 하신 후 부근 고적을 둘러보신 후 불국사로 향하셨다고 하더라."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이끄는 조사단은 1926년 5월 중순부터 11월에 걸쳐 50여 기의 고분을 발굴했는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서봉총이었고 고이즈미는 이때 다카마쓰노미야가 서봉총을 방문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 터의 설명 판에는 다카마쓰노미야가 발굴 현장을 방문한 날을 9월 21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사에서 말하는 '부근 고적'은 서봉총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경주박물관에서 신라 토기를 받아 소장했고 설명 판을 쓴 시게지로는 당시 일본의 해군 전함 '후루타카'의 기관장이자 의장원으로 근무한 '구도 시게지로'로 추정되며 다이쇼 천황의 셋째 아들인 다카마쓰노미야는 1925년 12월에 해군 소위로 임관해 일본 해군의 2번 전함인 '후루타카'를 타고 동해안을 따라 항해하던 중 경주를 들른 것으로 파악됩니다.
고위 공직자 도굴범 '모로가(諸鹿)'
1926년 당시 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의 분관장을 맡고 있던 사람은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 설명 판에는 누가 누구에게 줬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경주박물관으로부터 받았다'라고만 기록돼 있는데요, 이 토기와 설명 판을 입수하고 공개한 정인성 교수는 "당시 경주박물관장인 모로가가 직접 주었거나 적어도 그의 허락이 없이는 '고귀한'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을 줄 수 없었을 겁니다."라며 신라 토기를 준 인물로 모로가를 지목했습니다.
대전대학교 이한상 교수도 "누구를 지칭해서 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카마쓰노미야 방문단에게 준 것은 확실하고 그렇다면 경주박물관장 모로가 히데로로부터 받지 않았을까, 이렇게 보는 거죠."라며 같은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모로가 히데오는 누구일까?
1908년 조선으로 건너와 무역업을 하던 인물로 1910년부터 경주에서 사실상 도굴을 통한 유물을 수집했습니다.
1921년 금관총 발굴에도 관여했으며 사사로이 도굴하고 도굴한 유물을 팔거나 고관들에게 선물하는 식으로 로비(?)해서 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의 관장 대리까지 맡게 된 사람입니다.
이른바 청와대 미남석불도 모로가가 1913년 경주 이거사에서 조선 총독 관저로 옮기는 식으로 고관들에게 로비해 온 기록도 있는데, 모로가는 우리 유물을 함부로 도굴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써 왔고 결국 현 경주박물관의 관장직까지 맡게 됩니다.
관장 대리로 재직하면서 모로가의 도굴과 유물 매매는 더 심해지고 결국은 법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1933년 5월 9일 자 부산일보에는 모로가 히데오가 유물을 도굴하고 판매하는 등의 혐의로 자택 등을 압수 수색당한 뒤 구속됐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경주박물분관 주임(지금의 관장) 모로가 히데오 씨 수감되다. 귀중한 고분 출토품 공모매매 의혹 아무아무 대관에게 증여했다고?'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원 검사의 지휘에 의해 취조됐으며 경주경찰서의 유죄의견을 붙여서 검사 분국에 송치되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황오리 노서리 등의 고분을 발굴했지만, 좋은 유물이 없고 도굴된 흔적이 역력해서 수사가 시작됐으며 대구 검사국 쿠로세 검사의 후원으로 가택수색을 했으며 금은제 장신구와 비치, 루비 등 보옥 2만 엔 상당을 압수하였고 유물들을 대관들에 증여한 흔적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굴과 문화 권력
정인성 교수는 모로가의 자필 편지를 한 통 공개했습니다.
모로가가 당시 조선의 유력자이자 조선총독부 박물관 심의위원인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에게 보낸 것으로 사천왕사에서 도굴한 녹유신장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신이 '호메이(호미)'로 땅을 파고 아이들을 시켜 땅을 파다가 녹유신장상을 발견했으며 이를 찍은 사진을 동봉하니 고고학회지에 실으면 어떻겠냐'는 내용입니다.
편지를 쓰기 이전에 사천왕사의 녹유신장상 가운데 하나를 아유가이에게 선물한 모로가는 다른 하나의 녹유신장상을 학회지에 실어달라는 겁니다.
일본의 유수 고고학 저널에 녹유신장상을 실으면 자기가 가진 유물의 값어치도 올라가겠지만, 도룩에 대한 면죄부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정인성 교수의 설명입니다.
녹유신장상은 당시 사천왕사의 대웅전으로 보이는 사찰 건물의 앞마당에 있던 두 개의 탑이 있었는데 그 탑의 기단 부분에 있던 전상입니다.
녹유신장상은 신라의 수호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중요하고 귀한 유물이지만 모로가는 이를 자신의 영달을 위해 사사로이 사용했던 겁니다.
지금까지 일본은 일본 땅에 있는 조선의 유물이 불법적인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금령총, 식리총, 금관총 등 경주에 있던 신라의 귀한 고분마다 도굴한 것으로 보이는 모로가의 행적은 백 년 가까이 지난 지금 구체적인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조각에 해당할 수도 있지만 이번 신라 토기와 모로가의 자필 편지는 그들을 향해 피해자에게만 입증 책임을 묻는 뻔뻔한 태도에 대해 수정을 요구할 수 있는 값진 자료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