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아직도 많은 우리 문화재가 해외를 떠돌고 있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인데요, 인터넷 경매사이트를 통해서 일부가 되돌아오기도 합니다.
한 대학의 박물관장이 일본의 경매사이트에서 신라시대 토기를 되사왔는데요,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우리 문화재를 모은 '시라가'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김철우 기자 나와 있습니다.
이번에 돌아온 것이 압독국 유물인가요?
◀기자▶
먼저 시라가가 소장한 것으로 보이는 압독국 유물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압독국은 경산시 압량지역에 있던 삼국시대 초기의 작은 나라 이름입니다.
압량국이라고도 하는데요, 102년 신라의 옛 이름 사로국에 투항했다가, 사로국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된 뒤, 주민들이 모두 사로국 남쪽으로 강제 이주당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하지만 지역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은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는데요, 이번에 영남대 정인성 박물관장이 일본의 옥션에서 사 온 토기는 압독국 토기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사이 경산지역에서 만들어진 토기는 신라 토기들보다 목 부분이 곧고 깁니다.
또 토기 목 부분을 3단, 4단씩 구획해서 파상문을 넣은 아주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앵커▶
그런데, 도굴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고요?
◀기자▶
경산의 고대국가인 압독국과 관련된 임당동 유적은 1918년 도쿄대 교수인 하라다가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 뒤 해방되기 전까지 발굴이나 도굴과 관련한 어떤 발굴 조사 보고서나 기록이 없어서 임당동 유적은 해방 이후 도굴됐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입니다.
그런데 정인성 영남대 박물관장은 이 토기가 도굴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토기가 들어있던 오동나무 상자에는 1930년대 시라가라는 사람이 감정했다고 돼 있는데요, 흠이 거의 없는 완전한 모양의 토기가 당시 시중에 나돌았다는 점으로 미뤄 압독국 고분을 당시에 도굴하지 않는 이상 이런 토기를 손에 넣기는 힘들다고 강조했습니다.
◀앵커▶
이번 발견이 대구에 의미하는 바도 크다고요?
◀기자▶
이 토기를 감정한 것으로 나타난 시라가라는 인물 때문입니다.
이 토기가 들어있던 오동나무 상자의 뚜껑에는 묵으로 신라 삼국시대, 천삼백 년 전, 신라 토기를 의미하는 신라소, 쇼와 10년, 그러니까 1935년 더운 여름날 조선의 대구에서 '백옹'이라는 일본인이 감정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1930년대에 대구에서 토기를 감정했다가 일본으로 반출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백옹이라고 이름을 쓴 사람은 시라가 슈키치밖에 없다는 겁니다.
시라가는 일제강점기 지금의 경북여고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신라와 고려, 조선의 문화재를 끌어모아 오구라와 이치다에 못지않은 대규모 컬렉션을 소유했던 사람입니다.
해방 이후 오구라와 시라가의 유물 수천 점을 중심으로 당시 대구부립박물관, 즉 시립박물관 설립이 추진됐지만 거의 대부분 도난당하고 맙니다.
그래서 시라가 유물의 재조사와 재평가는 대구 근대사에 매우 중요하다는 겁니다.
영남대 박물관은 '시라가 컬렉션'에 대한 연구와 함께 압독국 유물의 도굴 가능성에 대한 조사에도 나서서 묻혀있던 대구와 경산의 근대사를 다시 쓸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