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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대구 민주의 봄] ②2·28 결의문 작성자는?

◀앵커▶
우리나라 민주운동의 시작, 2·28 63주년 연속 기획보도입니다.

2월 28일 학교 지시로 등교한 학생들은 결의문 낭독 직후 거리로 뛰쳐나갔습니다.

장엄한 결기로 가득 찬 결의문은 학생 시위에 불을 댕겼습니다만 누가 썼는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대구MBC 취재진이 확인했습니다.

조재한 기자입니다.

◀기자▶
"백만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이 민족의 울분, 순결한 학도의 울분을 어디에 호소해야 하나?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피 끓는 학도로서 최후의 일각까지 부여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련다." 

1960년 2월 28일 경북고 이대우 학생이 단상에서 학생들에게 외친 결의문입니다. 

결의문은 두류공원 2·28 기념탑 석판에도 새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63년이 지나도록 작성자는 누구인지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수소문 끝에 결의문 작성자는 경북고 하청일 학생으로 특정했고 기록 확인에 나섰습니다.

취재진은 하청일 학생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살펴봤습니다.

생활기록부에는 하청일 학생을 '2·28 학생의거 선언문 작성자'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정부 때 비상한 주목을 관헌으로부터 받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학생의 적성으로 선생님은, 놀랍게도 '혁명가'로 기록했습니다. 

2·28 시위로 경찰에 끌려간 학생 대부분은 훈방 조치됐습니다.

하지만 하청일 학생은 경찰에 여러 날 동안 잡혀 조사받아야 했습니다.

공납금 미납으로 제적돼 학생 신분이 아닌 탓에 훈방에서 제외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제적 상태였으나 2·28 핵심 주역인 이대우 학생이 문장력이 뛰어난 1년 선배 하청일에게 부탁해서 결의문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복학을 하고 졸업까지 한 하청일 학생은 47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습니다.

이같은 사실이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하청호 경북고 하청일 동생 대구문학관 관장▶
"어머니는 그게 드러나는 걸 원치 않았죠. 왜냐하면 나와 동생이 다 공직에 있었고 지금처럼 2·28이 국가기념일 되고 사회에서도 2·28에 대한 재조명이 되고 이러는데 그전에는 안 그랬거든요."

결의문은 사회 현실에 대한 단순한 울분 토로가 아닌 역사적 사명감을 담았으며 고등학생 수준을 뛰어넘는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대한민국의 역사를 아시아와 세계 역사 속에 편입시켜서 확대해가고 싶은 그런 역사적 사명감 같은 것은 대단히 소중하고 결의문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아닌가?"

2·28 결의문을 작성한 하청일 학생은 '혁명가'로 평가받았습니다.

피 끓는 학생들의 정의감에 호소하며 최초의 민주운동 시작을 알렸지만 결의문의 마지막 빈자리를 채웠어야 할 그 이름은 63년이 지나도록 채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mbc 뉴스 조재한입니다. (영상취재 김종준 C.G 김현주)

조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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