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 선생은 '문화로 나라를 지킨다'는 위창 오세창 선생의 가르침을 평생 실천하며 일제강점기에 회화와 서예, 전적과 도자 등 문화유산을 꾸준히 모았습니다. 대구 간송미술관은 서울 간송미술관의 첫 분관으로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9년 만의 기다림 끝에 지어진 대구 간송미술관은 간송 전형필 선생의 ‘문화보국’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특히 개관전인 '여세동보‘는 세상 함께 보배 삼아라는 의미를 담아 훈민정음과 미인도 등 유명한 국보와 보물을 한 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 토크ON에서는 간송미술관 개관전에서 만날 수 있는 국보와 보물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전인건 대구 간송미술관장으로부터 들어봅니다.
[김상호 사회자]
지정된 국보, 보물이라는 것 자체보다는 그냥 한 점 한 점이 소중하지 않은 게 없겠습니까? 그런데 관람하는 입장에서는 '국보가 왔다', '보물이 왔다' 하면 또 눈이 한 번 더 가는 것도 사실이거든요. 그래서 개관전에서 특별히 이 작품만은 꼭 봐야 는 대표적인 작품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전인건 대구 간송미술관장]
교수님 말씀하신 대로, 국보와 보물이라고 하는 것의 기준을 조금 말씀드리자면, 보물이 되려면 어떠한 종류, 도자기 청자가 됐든 뭐가 됐든 그중에서 정말 최고여야 합니다. 최고가 되면 보물이 되고, 그 보물 중에서도 유일하다든지 정말 전 세계 최고라고 할 정도로 너무나 중요하거나 아니면 역사적으로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것들만 국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국보, 보물로 지정됐다는 것 자체가 문화유산들의 특별함을 나타내는 것이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이번에 전시된 40건, 97점에 달하는 국보, 보물 중에서 가장 특이할 만한 건 아무래도 독립적인 전시 공간을 갖고 있는 훈민정음해례본일 것입니다. 그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굳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요.
그다음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고회화 작품 중 하나인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가 있을 것 같고요. 또 혜원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이라든지, 겸재 정선이 그린 18세기 금강산을 그린 '해악전신첩', 그리고 서울 근교를 그린 '경교명승첩'도 굉장히 눈여겨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다음으로는 도자기 중에서, 우리가 고려청자라고 하면 거의 자동으로 떠오르는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그리고 18세기 조선백자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이름이 길지만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이라는 작품도 역시 국보입니다. 그 백자의 병을 보시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고요.
또 불교 유물에서는 '계미명삼존불'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은 명문이 새겨져 있어 언제 만들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불상이며, 그 자체의 조형물도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이 불상은 고구려로 많이 알려졌지만, 삼국시대의 불상이고요.
그다음으로는 고려시대 사찰의 건축 양식조차도 알 수 있게 만들어진,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고려 불감인 삼존불감도 눈여겨보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그러니까 청자, 백자에 관해서는 일반인들의 머릿속에 청자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 백자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를 제공했던 그 실체 두 개의 작품도 이번에 볼 수 있고, 방금 말씀하실 때 제일 먼저 언급하신 게 훈민정음해례본입니다. 이것의 중요성은 정말 우리나라 문화유산 중에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중요한 유산인데, 이게 사연이 좀 많지 않습니까?
[전인건 대구 간송미술관장]
굉장히 많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찾아내고 그다음에 수집하게 되는 과정에서도 보도를 통해 저희도 얼핏 듣기는 했습니다만, 정말 많은 내용이 있을 것 같은데 일화를 소개해 주실까요?
[전인건 대구 간송미술관장]
훈민정음해례본 같은 경우에는 1940년경에 수장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때가 막 조선학회 사건을 총독부가 일으켜 수많은 한글 학자를 투옥하고, 몇 분은 돌아가시기까지 하고, 또 창씨 개명을 통해 이름을 빼앗길 정도로 폭압적인 문화 말살 정책을 펼치던 시기였기 때문에, 훈민정음해례본을 누가 가지고 있거나 찾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기만 해도 굉장히 위험한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안타깝게도 1446년에 출판된 훈민정음해례본 자체가 그 원본이 발견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그때 여기서 멀지 않은 안동에서 이게 발견됐다는 소식이 어떤 거간꾼을 통해 간송에게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아무리 비싸고 좋은 책도 한 500원 정도였고, 당시 기준으로 보면 서울에 있는 기와집 한 채가 한 1,000원 정도 하던 시절이니까 집 반 채 정도의 가격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너무나 특별하고, 또 위험한 책이었기 때문에 1,000원, 즉 집 한 채 값은 받아야겠다고 거간꾼이 제안했을 때, 간송께서는 거꾸로 제안하신 것이 "그 1,000원은 수고비로 줄 테니, 책을 정말로 가지고 온다면 내가 만 원을 주겠다"였습니다. 그러니까 11배의 가격을 오히려 더 올려서 역제안을 하신 것이죠. 그렇게 하셨던 이유는 아마 두 가지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설명해 드렸던 것처럼 너무나 위험한 시기였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라도 꼭 가지고 와야 한다는 것. 금액이 커야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너무나도 중요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이기 때문에 그 정도의 대접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제안한 다음에 한 1년이 넘은 시기를 거쳐서야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아마 그런 제안이 있었기 때문에 1년 후에도 결국에 손에 넣을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손에 넣으신 후가 또 더 중요합니다. 손에 들어온 후에 간송께서는 홍기문, 송석하라고 하는 서지학자, 그러니까 책을 연구하는 분과 젊은 한글학자 두 분을 불러 이 책을 필사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한글을 폄하하기 위해 몽골의 문자를 그대로 베꼈다느니, 창살을 보고 우연히 만들어졌다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이론들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학자 두 분이 신문에 안동에서 훈민정음해례본이 드디어 발견되었고, 그 내용은 이렇다고 연재하여 그 이론들을 정면으로 반박하게 했습니다. 물론 소장처는 숨긴 채로.
그렇게 한 후 그 신문은 강제 폐간되었고, 간송께서는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보관하시다가 광복을 맞이한 후 조선학회 관계자들을 불러 다시 공개하셨습니다. 그리고 1945년 광복하자마자 이 책을 다시 공개하고, 사진 촬영을 통해 첫 번째 영인본, 즉 연구용 영인본을 출판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현대적인 한글 연구의 시작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요. 이렇게 1946년에 펼쳐진 것이 바로 '한글학회본'이라고 부르는 연구용 영인본입니다. 이는 간송께서 문화재 수집을 왜 하셨는지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관장님 설명을 듣고 실제로 이 해례본을 보면 많은 분이 마음이 찡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지켜온 것이고, 이것을 확보해야만 했던 이유까지도 우리가 알면, 그냥 단순히 오래된 옛날 책이 아니라 참 어떻게 지켜온 나라인가 이런 생각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전인건 대구 간송미술관장]
저희도 간송께서 이렇게 소장하셨던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도 간송미술관이 갖고 있는 굉장히 중요한 자원이지만, 또 동시에 말씀하신 대로 간송과 위창께서 해오셨던 그 일, 그 역사 자체도 굉장히 소중한 자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국보와 보물, 국가 문화유산 98점이 대구미술관에 지금 무사히 도착해서 관람객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술관 설립 이래 이런 규모의 한두 점도 아니고 국보급, 국보와 보물, 국가 문화유산 98점이 한꺼번에 이동한다는 것은 거의 일종의 작전이라고 부를 만큼 어마어마한 일이었을 것 같아요. 이 진행 과정을 소개해 주시죠.
[전인건 대구 간송미술관장]
지금 말씀하신 대로 사실 간송미술관 역사상에도 가장 큰, 어떻게 보면 전시를 위해 이동하는 것으로서는 가장 중요하고, 또 이렇게 많은 지정문화재가 한꺼번에 나온 전시도 저희가 처음입니다. 그런데 또 동시에 말씀하신 대로 이게 서울에 있는 보화각에서 대구 간송미술관으로 이송하는 것도 굉장히 어려움이 많았는데요.
또 이 자리를 빌려 경찰청에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 게, 서울시경, 대구시경뿐만이 아니라 중간에 거쳐 오는 300km가 넘는 거리 동안 고속도로 순찰대 여러 지구대에서 교대하시며 철저하게 경호를 해주셨기 때문에, 비도 오고 굉장히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안전하게 이송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같이 동승하여 쭉 내려오면서 많은 분들이 고생하신 것을 눈으로 보기도 하고, 마음도 찡했습니다만, 안전하게 그렇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차량도 진동이 없는 차량을 이용해서 호위하고, 거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느낌으로 진행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힘든 과정을 통해 이송된 문화재들이 지금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번 개막전도 굉장히 중요합니다만, 이제는 상설 전시의 의미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대로 원래 하고 싶었던 문화재를 널리 함께 누리고자 했던 그 선생님들의 취지에 맞는 일이, 앞으로 이 대구 간송미술관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회화, 고문서, 책들, 전적 등 지류 문화유산이라 부르는 것들에 대해서, 대구간송미술관이 표방하는 내용을 보면 영남권 지류 문화유산 수리 복원 허브를 목표로 한다고 하셨는데,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어떤 목표를 갖고 있는지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전인건 대구 간송미술관장]
사실 대구, 안동, 경북 이쪽은 예전에 유림이라고 불릴 정도로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말씀하신 서화류나 서책류들이 굉장히 많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이 지역만 해도 우리나라 전체 지류 문화유산의 절반 정도가 여기 있다고 할 정도로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기후 위기 때문에 보관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남 지역에는 지류 문화유산을 전문으로 복원하거나 보수, 수리를 담당하는 기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저희는 그런 부분에서 보존과 수리에 대한 노하우를 오랫동안 쌓아왔습니다. 그래서 저희 대구 간송미술관은 지류 문화유산 보존, 수리, 복원에서 활용까지를 연결하는 허브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수장고도 필요 이상으로 크게 지은 이유도 긴급하게 수리하거나 보관이 필요한 문화유산들을 보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과정에서 연구와 전시, 교육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대구·경북 지방에서 저희가 제공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구광역시에도 보존이 필요한 고문서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대구시가 보관하고 있는 고문서 중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들을 선별하여 수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시나 관공서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필요하다면 저희가 선별하여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보존이 상당한 예산이 들어가는 일이라, 대구시에서 예산 지원을 잘해 주시면 저희가 확대해서 더 많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비단 대구시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지원이 필요한 사업처럼 보이는데, 이 부분도 잘 해결되길 바랍니다. 오늘 여러 말씀을 더 듣고 싶지만, 시간 관계상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간송이 대구에 온다고 했을 때 많은 분이 환호하고 좋아했습니다. 대구 지역에서 간송미술관을 유치하게 된 것이 가지는 의미를 지역사회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간송미술관 입장에서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계획이나 입장, 그리고 관람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을 끝으로 부탁드립니다.
[전인건 대구 간송미술관장]
아까 말씀드렸던 지류 문화의 보존이라든지 이런 활용에 대한 허브의 역할도 있고요. 또 하나의 가장 큰 중요한 기둥이 아무래도 교육이 될 것 같습니다. 처음에 왔을 때부터 교육감님과 계속 회의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 지역사회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더 넓게는 성인 교육이라든지 시니어분들까지 포함해서, 우리 문화재와 문화유산에 대해 알려드리고, 어떻게 하면 향유할 수 있는지 고민했습니다.
알면 알수록 더 재미있어진다고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걸 알려드리는 일, 특히 학생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이런 경험을 하게 하면, 저희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경험에 따르면, 알게 되면 굉장히 좋아하고, 자긍심과 자부심을 느낄 만한 충분히 아름답고 빼어난 것이 우리 문화유산이기 때문에, 각급 학교와의 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해서 어린 시절부터 성장해 가면서 같이 향유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대구 간송미술관의 11개 기둥에 이어서, 12번째 기둥이 여러분이 되어주셔서 우리나라의 빼어나고 중요한 문화유산을 지키는, 이 문화보국의 일에 같이 동참해 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관장님, 마무리하기 전에 12번째 기둥들이 개막전을 가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개막전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짧게 소개해 주시죠.
[전인건 대구 간송미술관장]
네, 저희가 사실 2018년도에 대구미술관에서 조선의 명품전을 했을 때, 굉장히 많은 분이 줄을 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9월은 아직 더운 시기이기도 해서요, 저희가 인터넷 예매를 통해 1시간당 몇 분씩 분산시키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간송 대구 간송미술관 홈페이지에 들어가시면 티켓 구입 링크가 있고, 검색을 통해서도 링크를 찾을 수 있으니 예약하고 오시면 조금 더 편안하게 관람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예약하고 가셔야 합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예약하는 방법이 나와 있다고 합니다. 오늘 전인건 대구 간송미술관장 모시고, 간송미술관 개관에 따른 여러 가지 에피소드와 계획,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전인건 대구간송미술관장]
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