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필수 코스였던 대구 달성공원···'키다리 아저씨'와 '복동이'의 추억
대구 달성공원은 한동안 학창 시절 소풍과 어린이날 필수 코스였습니다. 대구시민이라면 한 번은 가 본 곳, 대구시민과 늘 함께해 온 곳이죠.
오랫동안 달성공원의 마스코트는 '키다리 아저씨'였습니다. '키다리 아저씨' 류기성 씨는 키 225m로 6.25 전쟁에도 참전했습니다. 1968년 대구백화점이 개업할 때 백화점 홍보인으로 스카우트 된 뒤 1971년 달성공원 개원과 동시에 달성공원 직원으로 근무했습니다. '키다리 아저씨'로 불리며 1998년까지 30년 가까이 달성공원 문지기로 일하다가 1999년 지병으로 숨을 거뒀습니다.
아시아코끼리인 '복동이'도 유명했습니다. 1975년 2살 때 한 기업의 기증으로 달성공원 식구가 된 뒤 2023년 건강 이상으로 사망할 때까지 50년간 달성공원의 상징이었습니다. 몸무게가 5톤이 넘고 상아도 커서 아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처럼 달성공원은 많은 추억과 기억이 쌓여 있지만 사실 이곳은 공원보다 토성, 즉 흙으로 지은 성으로 먼저 시작했습니다. 대구가 달구벌로도 불리던 삼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그 왕성이 있었던 곳입니다.
정인성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달성의 기원은 삼한 시대, 즉 한반도에 처음으로 나라가 생겨나던 시기입니다. 그때 대구는 달구벌, 달구화, 달벌 등으로 불렸죠. 벌이라고 하는 것은 불이라는 뜻이기도 하여 한자로 '火'라고도 합니다. 달벌성, 달성의 '달'은 고대 지명에서 약간 높은 곳을 의미한다고 하죠. 이게 한국의 대표 역사서인 삼국사기에 딱 나옵니다. 261년에 달벌성을 쌓았다는 이야기죠. 경주 월성의 축성술이 활용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라가 대구지역을 복속하면서 성곽을 쌓았다는 의미로 해석하는데요, 그런데 경주 신라가 대구를 복속하기 훨씬 이전부터 여기에 성채, 토성 시설이 있었다는 것이 조사를 통해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경주 월성과 대구 달성을 축성한 세력이 서로 친연성이 있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바를 듯합니다"
성벽의 길이 1.3km였던 달성토성···대구분지의 가장 큰 마을이 달성에 있었다는 추정 가능
한반도에서 처음 만들어진 성곽은 대체로 흙을 쌓아서 만들었습니다. 고조선 시기는 모두 토성이고 초기 백제도 신라로 성장하는 진한 세력도 곳곳에 토성을 축조했습니다. 경주에는 월성토성, 영천에 골벌토성, 대구는 달성이 대표적인 토성입니다.
삼국시대가 되면 돌로 된 성곽이 등장하는데요, 이후 고려와 조선은 돌로 축조한 성곽이 많지만 이때에도 토성, 혹은 돌과 흙을 섞어서 만든 성곽이 계속 만들어졌습니다.
성은 보통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웁니다. 달성토성이 지금의 위치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대구에 처음 나라가 세워질 때, 즉 삼국 이전의 삼한 시대에 대구분지의 가장 유력한 세력의 가장 큰 마을이 대구 달성에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정인성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어 일반 시민들이 규모를 가늠하기는 좀 어려운데요, 토루의 높이가 5m 이상인 곳도 있고요, 성벽의 길이가 1.3km입니다. 100미터 달리기를 13번이나 해야 하는 거리입니다. 대단한 크기이죠"
달성은 대구 달구벌 역사 정체성의 요체···일제강점기 되면서 정체성의 맥락 잃어
지금의 달성공원 터는 고려 중기에 달성 서씨들이 살다가 조선 세종대에 달성 서씨가 국가에 헌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도 달성 변에 달성 서씨의 집성촌이 있고 성곽 안, 현재 달성공원 정문 왼쪽에도 달성 서씨 유허비가 있습니다.
정인성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달구벌의 중심이 바로 달성입니다. 대구에 처음 작은 나라가 생겼을 때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대구 달구벌의 역사 정체성의 요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중요한 장소가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역사 정체성의 맥락을 잃고 말았죠. 러일전쟁 이후에 승리 기념 공원이 조성되고 1905년, 그리고 1906년에 신사가 조성되어서 일본의 신을 모시는 공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달성공원 정문을 들어가면 직선으로 두 그루의 나무가 보입니다. 바로 가이즈카 향나무인데요, 가이즈카라는 이름은 오사카의 지명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1909년 1월 달성공원을 방문한 순종 황제와 이토 히로부미가 기념 식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찬호 사회학자 "가이즈카 향나무는 우리나라 전역에 조경수로 많이 심긴 나무였어요. 이 향나무가 교목인 학교도 많은데, 이게 일본산이라고 해서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명분으로 많이 잘려 나갔습니다. 국회의사당에도 있었는데 2018년에 5그루를 제거하기도 했습니다"
정인성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달성공원에 만들어진 대구 신사가 제일 문제라고 할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대구로 대거 이주하면서 러일전쟁 이후에 달성 안에 요배전이라는 부속 시설도 만들었거든요? 요배전은 일본 덴노, 그러니까 국왕에게 절하는 건물이라는 의미입니다. 해방 직후에 철거가 시작되어 중요 신사 시설은 1946년에 철거됐지만 나머지 건물은 1966년 무렵에야 철거됐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은 조선과 한국의 역사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일본인들의 상징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식민 지배의 폭력성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달성에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달성공원 기성회를 만들었는데요, 공원 조성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구 최초로 복권 추첨 행사를 열기도 했습니다. 회비는 당시 1원이었는데, 복권에서 1등이 되면 200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달성공원 입구에 세워진 순종 동상···'다크 투어리즘'?
아이러니하게도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자는 움직임과 달리 달성공원 입구에는 순종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1909년 순종의 대구 방문을 기념해서 순종 황제 어가길이 생겼는데요, 당시 신사참배를 위해 순종이 방문한 것으로 순종 황제에게는 굴욕적 사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각에서는 역사의 어두운 면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다크 투어리즘'을 표방하기도 합니다.
제이크 레빈 계명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저는 다크 투어리즘이라는 개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만약 독일에 있다면 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 있으면 한국전쟁과 일본 식민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장소를 방문하는 것이 다크 투어리즘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대부분은 다크 투어리즘입니다. 통영을 방문하는 것처럼, 한편으로는 이순신 장군이 그곳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 동상 때문에 가뜩이나 좁은 길이 더 좁아지면서 일대 교통이 더 혼잡해졌고 시민사회에서도 철거 요구가 이어졌습니다. 결국 대구 중구청은 달성토성 복원 사업 용역이 끝난 뒤에 철거 절차를 밟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빨리 철거를 할 수 없는 이유로 든 것이 순종 황제 동상이 국고보조금으로 취득한 재산이어서 철거나 용도 변경 시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돈을 들여서 추진하고 철거한다고 또 돈을 들이는, 이중으로 세금을 쓰게 된 셈입니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우리 유적과 유물을 잘 복원해야 하는데 광복된 이후에도 토성이 본 모습을 찾지 못하고 지금까지 달성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달성토성에 대한 연구 주권이 우리에게 없었습니다. 달성토성에 대한 고고학적인 조사도 일본인 연구자가 독점했습니다. 인류학계에서 이름을 날렸던 도리이 류조, 건축하의 세키노, 고고학의 아리미쓰 같은 연구자가 달성토성을 조사하고 연구했습니다. 우리는 해방 이후가 되어서야 경북대학교의 윤용진 교수가 조사를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해방 이후에도 아쉽게 우리가 달성토성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원인이 됐습니다.
결국 1996년 신사만 철거하고 3년 뒤에 재정비하게 되는데, 이때 현대화가 되면서 1970년 5월 2일, 동물원도 문을 열게 됩니다.
정인성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만약 대구에서 최초로 나라를 일으켰던 진한 소국의 왕성이었고 삼국시대 대구의 최대 고분군을 조성한 집단의 성곽이었다는 것을 이해했다면 동물원으로 조성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일제가 창덕궁을 동물원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하지 않습니까? 대구에서도 비슷한 일이 우리 손으로 벌어진 것이죠"
** '시민의 품격', 대구MBC 매주 목요일 밤 9시 방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