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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보니] 선거 ② 제주의 '눈물'과 상상 초월의 부정선거 | 시민의 품격


나라와 시민의 삶을 바꿀 수 있는 투표, 우리나라의 경우 최초의 투표는 해방 이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신분제가 명확했던 조선시대에도 백성들이 참여한 국민투표가 있었습니다.

조권호 대구시 선거관리위원회 서기관 "국민투표는 국가의 중대한 사항을 주권자인 국민의 의사를 물어 결정하는 투표를 말하는데요, 세종대왕 때 국민투표가 진행됐습니다. 부정부패가 심각했던 조세제도를 바꾸기 위해 조세법과 관련된 찬반 의견을 직접 백성에게 묻고자 한 건데요, 노비, 여자, 어린이를 제외한 백성과 관리를 대상으로 호구에 등록된 조선의 총인구 약 4분의 1에 대당하는 17만 2,806명을 대상으로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출직 선거는 1948년 5.10 총선거···한국 정치의 큰 구조 만들어
현대적 의미의 본격적인 선거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시작되는데요, 우리나라 최초의 선출직 선거가 바로 1948년 5.10 총선거였습니다.

오찬호 사회학자 "제주 4.3에서 이 5.10 선거는 너무 중요한 맥락 속에 존재합니다. 1947년 3.1절 행사 때 총기 발포로 여섯 명이 사망하면서 제주는 시끄러워지고 이후 여러 명이 고문받다 죽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의 무장 봉기가 있었고 이는 5.10 선거 거부로 이어집니다. 당시 제주도는 선거구 세 개 중 두 개가 투표율 미달이 될 정도로 적극적인 거부 운동을 펼쳤고 많은 사람이 투표일에 한라산 쪽으로 올라가 있고 그랬습니다. 그 이후 끔찍한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 선거가 압도적인 투표율이라는 건 어떤 시각에서 보면 대단히 비민주적인 배경에서 가능했다는 측면이 있습니다. 빨리 국가로서 인정받으려는 그런 조급함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친일파 청산도 하지 못했고, 그런 막무가내식 수습에 민중들이 화가 났던 겁니다. 국가가 이후 어떻게 제주도민을 학살하는지를 살펴보면 그런 조급함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마치 남한은 공산당의 '공'자도 모르는 사람들로만 있어야 한다는 의지를 미국에 보여주고자 하는 결의가 당시에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조권호 대구시 선거관리위원회 서기관 "1948년 5월 10일 선거는 1945년 광복 이후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로 당시 남북한 단일 선거를 하지 못하고 분단의 서막이 된 남한 단독 선거라는 아쉬움과 가슴 아픈 정치적 상황들이 있었지만, 이 선거는 한국 정치의 큰 구조를 만든 선거라고 할 수 있어요. 당시 국회의원선거법은 보통·평등·비밀·직접선거라는 4대 선거원칙에 입각했고, 선거권은 만 21세, 피선거권은 만 25세에 달한 모든 국민에게 주어졌어요. 일제강점기에 친일행위나 일본 정부로부터 수혜를 입은 일본 고위급 공무원들에게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하지 않았고요. 당시에는 투표인으로 등록해야 투표가 가능했는데, 등록 유권자가 784만 명으로 유권자 대비 등록률이 79.9%였습니다. 최초의 민주선거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다른 나라들은 재산·성별·인종에 따른 참정권 제약이 있다가 점차로 완화되었지만 5.10 총선거는 여성을 포함한 모든 국민에게 일시에 참정권을 부여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앞서 본격적인 보통선거를 실시한 겁니다. 선거의 의미를 되새기고 투표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2012년 중앙선관위에서 제정한 법정기념일 '유권자의 날'은 매년 5월 10일인데요, 그만큼 5.10 총선거가 우리 선거 역사에서 갖는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거 기표용구로 쓰였던 탄피···기표용구의 변천사
1950년대 한국전쟁으로 당시 우리나라 곳곳에는 탄피가 널려 있었는데요, 투표에 이 탄피가 사용됐습니다. 1952년부터 약 20년 동안 전국의 기표용구 대부분은 대나무와 탄피로 제작됐는데요, 한국전쟁 이후로 탄피가 여기저기 널려 있어서 구하기도 쉽고, 끝 부분도 동그랗게 찍기 좋고 해서 기표용구로 탈바꿈을 한 겁니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는 기표대에 끈으로 묶어둔 흰색 플라스틱 용구가 활용됐는데, 플라스틱 용구를 따로 만든 곳도 있고 불펜대로 투표를 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역별 편차가 너무 커서 1985년 들어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표준화된 플라스틱 기표용구를 사용하게 됩니다.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인 2006년부터는 인주가 내장된 일체형 기표용구가 탄생합니다.

조권호 대구시 선거관리위원회 서기관 "원형표의 기표용구에 인주를 묻혀 찍고 인주가 안 말랐을 때 반으로 접으면 어떻게 될까요? 기표 부분이 다른 후보자에게 전사됐을 때 어느 후보자에게 기표한 건지 밝혀내기가 어렵죠? 그래서 무효표가 다수 발생했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1992년 제14대 대선을 앞두고 원형에 사람 인(人)자를 결합한 기표모양이 등장했는데요, 여기서 또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 인(人)자는 좌우대칭이라 기표용구를 정방향으로 찍지 않았을 때는 무효표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던 거죠. 그렇게 해서 1994년부터 사람 인(人)자가 점 복(卜)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점 복(卜)자는 상하좌우가 모두 비대칭이어서 투표지를 접었을 때 다른 후보자의 기표 부분에 전사되더라도 어느 후보자에 기표했는지 판별이 가능했고 그래서 무효표를 많이 줄일 수 있었죠. 참고로 최근에는 인주도 속건성 잉크를 사용하게 되면서 묻어남도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단군 이래 최대 부정선거'였던 1960년 3월 15일···'쌍가락지 표' '샌드위치 표' '올빼미 표'도 등장
독립을 통해 우리의 주권을 되찾고 선거권도 쟁취해 냈지만 진정한 민주 선거의 길이 탄탄대로였던 건 아닙니다. 1960년 3월 15일은 '단군 이래 최대의 부정선거'가 발생한 날입니다.

장우영 대구가톨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승만 대통령이 12년 동안 했던 장기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대규모 선거 부정을 저지른 사건인데요, 당시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는데, 대통령 선거 야당 후보였던 민주당 조병옥 후보가 선거 몇 달을 앞두고 사망하게 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단일 후보가 되었는데요, 그런데 왜 부정선거를 저지르게 되었느냐, 당시 현직 부통령이 민주당의 장면 후보였거든요? 자유당 입장에서는 여든 여섯 살의 이승만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면 장면 부통령이 대통령의 자리를 대행하면서 정권 교체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를 부통령으로 뽑으려는 계획을 세운 거죠"

오찬호 사회학자 "어떤 방식으로 부정이 이뤄졌냐 하면요, 먼저 공무원들을 꼼짝 못하게 했습니다. 당시 최인규 내무부장관이 각 지방 시장, 군수, 경찰서장을 찾아가 사표를 받았습니다. 부정선거에 협력하지 않거나 선거 결과가 좋지 않으면 전부 파면시킨다고 압박한 겁니다. 또한 선거 시작도 안 했는데 투표함이 40%나 차 있었다거나 마을마다 3인조, 9인조로 조를 짜서 투표소로 같이 가게 하면서 조장이 자유당 후보를 찍어야 한다고 유도하고 서로 감시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사망한 사람들까지 선거인 명부에 올려 자유당에 투표하게 하기도 했죠"

김수박 시사만화가 "개표 때는 더 심각했는데요, '쌍가락지 표'라고 민주당 표를 찍은 투표용지에 도장 하나를 더 찍어서 무효표 만들기, '샌드위치 표'라고 야당 표 뭉치 위아래에 여당 표를 끼워 놓고 한 묶음이 모두 여당 표라고 우기기, '올빼미 표'라고 개표할 때 불을 끄고 자유당 표를 집어넣고 상대방 표 묶음 훔치기, 투표함 바꿔치기, 검표 안하고 자유당 표로 집계하기 등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다보니 어떤 지역구에서는 유권자 수보다 투표수가 더 나와 투표율 120%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개표가 시작되니 정부에서 하향 조정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는데요, 득표율 조정으로 최종 득표율이 이승만 후보 86%, 이기붕 후보 79%를 받았다고 합니다.


3.15 대선을 앞두고 대구에서 펼쳐진 대한민국 최초 민주화 운동 2.28 민주화 운동
당시 사람들은 주변에 장면을 찍었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런 결과가 나오니 의심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대구에서는 공정한 선거를 위해 선거 전 대대적인 시위까지 했던 터라 대구 시민들은 더욱 부정선거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찬호 사회학자 "1960년 2월 28일, 3.15 대선을 앞두고 경상북도 대구시, 그러니까 현 대구시의 8개 고교 학생들이 자유당의 독재와 불의에 항거해서 시위를 했습니다. 이게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었던 2.28 민주화 운동인데요, 이 시위는 제1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시민들이 민주개혁을 요구한 최초의 시위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습니다. 대구는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의 부통령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야당의 도시로서 명성이 높았습니다. 따라서 2월 28일 예정된 장면의 대구 수성천변 유세가 전국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정부는 장면 박사의 유세장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대구의 8개 공립 고등학교에 일요일 등교 지시를 내렸습니다. 학생들은 일요 등교를 철회해줄 것을 요구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학생들이 부당한 일요 등교에 항의하기 위해 시위를 조직했습니다"

당시 일요일 등교의 명분은 중간고사, 영화관람에다 토끼 사냥도 있었습니다. 2월 28일 낮 12시 55분 경북고 학생부위원장 이대우 등이 학교 조회단에 올라 전날 작성한 결의문을 낭독하면서 민주화 운동이 시작됐는데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28 이후 3.15 부정선거가 이어지자 4월 마산 시위로까지 이어지게 되는데요, 결의문을 작성한 고 하청일 선생의 3학년 생활 기록부에는 '정의감이 강하며 타의 모범이 됨, 2.28 학생의거 선언문 작성자로 이 정권 당시 비상한 주목을 관헌으로부터 받음'이라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오찬호 사회학자 "사람들은 '민주화 운동'을 스펙타클한 사건 몇 개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4.19 혁명, 5.18 광주 민주화 운동, 6.10 항쟁 같은 경우 실제 스펙타클하기도 했는데 이런 식으로 역사를 이해하면 부작용이 따릅니다. 평범한 개인이 보기에 민주화 운동 같은 건 '대단한 사람'이 '목숨 걸고' 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일상에서는 '나는 그냥 무탈하게 살래' '소시민인데 뭘 어쩌겠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운동은 정말 집요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장 작은 단위로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어떤 단계에 이르다 폭발하는 것이죠. 2.28 민주화 운동을 이해하면 '어떤 사람'이 불의에 항거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 밟으면 꿈틀거려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우영 대구가톨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2.28이라는 민주화 열망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결국 3.15 선거는 부정 선거로 귀결이 되었고, 시민들의 마음을 더욱 꿈틀거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3.15 부정 선거 이후에도 부정 선거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요, 군부 권위주의 시대에 관건선거가 횡행했었죠. 민주화 이후에는 선거의 공정성이 회복됐지만 이젠 금권선거가 문제가 됐습니다. 금융실명제 정착과 정치자금법 강화로 2천년대 들어서 금권선거는 약화했지만, 정보화 시대가 되면서 정보화 역기능으로 부정선거 위협은 여전히 득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절차적 민주주의는 1987년 민주주의 이행 이후 8차례 대선과 4차례 권력 교체에 성공합니다. 후발 민주주의 국가 중에서 유일무이한 성과이죠"

<'시민의 품격', 대구MBC 매주 목요일 밤 9시 방송>


윤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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