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지배계층이라는 증거?
경산 임당동 고분군에서 발굴 과정에 4단식 출자형 금동관이 출토됐습니다.
금동관이 출토된 곳은 임당동 고분군 안에서도 외곽지역으로 고분이 훼손되면서 평지처럼 보이던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산책로 부근에서 넓적한 큰 돌이 발견됐고 발굴 조사를 했더니 고분의 천장 부분에 해당하는 개석이었습니다.
발굴 조사 결과, 관을 보관하던 석실이 나타났고 석실 규모는 지금까지 임당동 고분군에서는 보기 힘든 규모였습니다.
석실의 크기는 길이 330cm, 넓이 245cm로 경북문화재단 문화유산원의 한지욱 조사팀장은 "임당동에서 발굴 조사됐던 석실의 크기에 비해서 아주 큰 사이즈이고 봉분의 지름은 대략 15m 정도"라고 밝혔습니다.
석실의 바닥은 경산 지역 암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퇴적암이었고 그 위에 자갈을 깐 형태였습니다.
석실의 벽은 인근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화강암을 가져와 다듬은 뒤, 아치형으로 쌓았습니다.
그리고 석실 벽에는 마감용으로 회칠까지 한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4단식 출자형 금동관
발굴 중인 임당동 고분에서는 4단식 출자형 금동관이 출토됐습니다.
4단식 출자형 금동관은 경주에서도 금녕총과 천마총 정도에서 나왔을 정도로 흔치 않은 유물입니다.
임당동 고분군이 고대 압독국 지배층들의 무덤으로, 이번에 4단짜리 신라의 금동관이 발굴되면서 이 고분의 주인은 당시 지배계급 중에서도 최고위층 인물로 추정됩니다.
이 밖에도 순금 귀걸이와 허리띠 장식 등도 함께 발굴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데요.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정인성 교수는 "당시 신라 중앙정부에서 지방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회유책을 썼을 것인데, 금동관 자체도 신라 중앙에서도 흔하지 않은 타입이기 때문에 이번 발굴에서 나온 금동관과 이식(귀걸이)을 소유하고 있었던 피장자는 이 지역에서 아주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죠."라고 해석했습니다.
4세기에서 6세기 사이는 신라가 본격적으로 경부를 벗어나 영토를 확장하던 시기입니다.
당시 신라는 인근의 고대국가들을 힘으로 누르기만 하기보다 요즘으로 치면 외교에 해당하는 일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럽의 중세 시대 왕이 제후에게 봉토를 하사하듯이 신라의 왕은 인근 지역의 고대국가 지배층들에 금동관을 비롯한 금귀걸이, 허리띠 등을 하사한 겁니다.
물론 신라 왕이 쓰던 것과 같은 황금 관은 아니라는 점에서 당시 신라와 압독국 간의 관계를 미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경주는 신라의 수도일 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 신라는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지배력을 공고하게 다집니다.
당시 경상도 지역에는 대구 달성의 지배 세력들을 비롯해 청도의 이서국, 경산의 압독국, 영천의 골벌국, 상주의 사벌국 등 지역마다 고대국가들이 있었습니다.
신라는 이들 국가에 대해 왕관을 주고 각종 귀금속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를 주면서 회유하기도 하고 통제한 것으로 보이는데,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외교 행위처럼 인근 고대국가들을 다스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경상도 각 지역에 있던 고대국가들은 신라에 복속이 되면서 역사에서 사라지지만 해당 지역에는 그 고대국가들의 흔적, 유적과 유물들이 아직도 발굴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계획 또는 사업은 미미하기만 합니다.
지속 가능한 역사 문화 자산
임당동 발굴 이야기를 다시 하자면 발굴 조사 현장 바로 옆에 고분의 개석으로 보이는 돌이 있습니다.
발굴 조사자들도, 교수, 연구자들도 또 다른 고분이 있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보고 있지만 예산이 없어 발굴 조사를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경북문화재단 문화유산원 신영에 조사연구 1팀장은 "임당동의 대형 봉토분 같은 경우에는 20~30% 발굴 조사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대형 봉토분 아래 그 이전의 유구들이 많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임당동 고분군 전체를 보면 아주 미미할 것 같습니다, 조사된 것은."이라고 밝혔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식이었습니다.
임당동 고분군을 비롯한 지역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고분군과 유적들은 발굴 조사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부지기수입니다.
역사 문화 자산들을 무조건 보존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밟고 사는 이 땅은 수만 년 전에는 공룡이 살았고 원시인들이 살다가 불과 수천 년 전부터 역사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과거의 흔적 모두를 보존하자는 것은 현실적으로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제대로 된 역사를 조사해서 이를 바탕으로 숨어있는, 덮여있는 우리 역사 문화 자산들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재조명하자는 것입니다.
일본 사가현의 요시노가리 유적처럼 말입니다.
보존을 위한 개발, 그리고 일반에 대한 제한적 공개와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주의 유적지에 놀이공원처럼 놀러 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유럽의 고성들이나 아시아의 유적들을 둘러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복원은 힘들겠지만, 그 당시 살았던 우리의 선조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떤 의식주를 갖고 있었고 어떤 놀이와 문화를 갖고 있었는지를 역사 지식이 높지 않은 일반인들도 향유할 수 있도록 해 준다면 그것이 바로 '지속 가능한 역사 문화 자산'을 더 효율적으로 보존하고 활용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경주 이외의 신라였던 지역, 대구를 비롯해 경산과 영천, 청도 등지의 고대 국가들, 그리고 거기에 아직도 묻혀 잠자는 유적과 유물들을 그렇게 만들어 보자는 겁니다.
역사 문화 자산들을 효율적으로 보존하되, 누구나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제한적인 개발과 접근, 활용이 뒤따르는 것이 그 자산을 더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그때그때 땜질하듯 부분적인 발굴 조사만 되풀이하기보다 우리의 역사 문화 자산을 지속 가능하게 보존하고 활용할 긴 안목의 계획과 실행이 이제는 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