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5일, 6·25 전쟁이 일어난 지 꼭 74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날 오후 최초의 카투사, 류영봉 참전용사를 만났습니다.
학교 간다던 고등학생은 전쟁터로 향했다
1950년 8월 16일 그날도 학교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류영봉 6·25 참전용사 "학교까지 걸어가는 도중에 경찰 아저씨들이 길 가는 남자들은 무조건 검문하는 거예요. '학생 이리 오라' 합니다. '왜 그러냐?' 하니까 '군대 가야 되니까'. '아 난 학생이고 나이도 안 됐습니다' 하니까 키 보니 됐다고. 할 수 있다고요."
그렇게 군정 트럭에 몸을 실었고, 18살 고등학생은 전쟁터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대구의 한 생수 공장에 징집돼 모인 인원은 2천여 명.
100명씩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배를 탔습니다.
류영봉 6·25 참전용사 "배를 타서 이틀 만에 요코하마에 내렸어요. 기차 타고 일본의 후지산까지 가는 거래요. 가니까 미군 7사단으로, 의무병으로 배속되는 거래요."
3주 동안 구호부터 응급 처치법을 배웠습니다.
류영봉 6·25 참전용사 "훈련을 영어로 하는데, 그 당시에 영어를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교관 한 명이 영어 하는 사람 나오라고 하는데 아무도 안 나갔어요. 고등학생이라 친구를 맺은 한 사람이 내가 영어 좀 한다고 말했어요. 영어로 대답하니까 조교를 시키더라고요."
'K1101755' 최초 카투사의 기록
그렇게 최초의 카투사, 의무병이 됐습니다.
'K1101755' 군번을 달았습니다.
K1으로 시작하는 군번은 카투사 1기에만 부여됐습니다.
미군 부대 속 한국인을 구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징집 한 달 뒤인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습니다.
류영봉 6·25 참전용사 "군산으로 상륙한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맥아더 장군은 인천을 선택했습니다. 그게 인천 상륙 작전이에요. 우리 부대는 인천 상륙 작전과 서울을 수복했어요."
압록강 혜산진까지 북진해 전세를 뒤집은 듯했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밀려 내려왔고, 장진호 전투에서는 사방이 중공군으로 포위되면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미 제1해병사단과 중공군 제9병단이 함경남도 장진군 장진호 일대에서 벌인 전투입니다.
당시 미군은 3만 명, 중공군은 12만 명의 규모였습니다.
영하 30도를 오가는 추위 속 전우들이 저물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류영봉 6·25 참전용사 "부상병도 많았어요. 영하 30도까지 됐는데 워낙 중공군이 많이 내려오다 보니 후퇴하게 된 거고요. 부상병들을 치료하지 못하고 나오면…그 이튿날 가보면 중공군과 부상병들이 앉아 있는 채로 얼어 죽어 있어요. 그 사람들을 들것에 실어 나와야 했죠."
작전상 후퇴를 해야 했는데, 사방을 둘러봐도 나아갈 길이 없었습니다.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이 시작됐습니다.
흥남 부두에 모인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미군이 후퇴한다는 얘기를 듣고 기다리는 사람들로 빽빽했습니다.
류영봉 6·25 참전용사 "배에 탈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피난민 몇십만 명을 피난시키는 게 도저히 안 되는 거죠. 알몬드 소장이 보더니 피란민들은 우리가 가면 저 사람들 전부 다 총살당해 죽는다, 얼마라도 우리가 데리고 가야 한다고 했어요. 군수물자를 내렸고 그만큼 사람을 더 데려가는 데 성공했어요.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영웅이라면은 알몬드 장군은 피란민들의 영웅입니다."
"혼자 살아남아 미안해요"
아흔둘의 참전용사는 함께 전쟁터를 누볐던 이들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고 했습니다.
류영봉 6·25 참전용사 "나 혼자 살아난 거니까··· 전사한 동료를 생각하면 내가 미안하고 나 혼자 살아나는 게 미안하고 그래요."
2020년 장진호 전투에서 목숨을 바친 고 김정용 일병 등 147명을 대신해 복귀 신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류영봉 6·25 참전용사 "조국으로 복귀 명을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충성!"
6·25 전쟁을 바로 알리기 위해 강단에 섭니다.
류영봉 6·25 참전용사 "젊은 사람 중에서는 6·25를 제대로 모르는 경우도 많았어요. 또 언제, 어떻게 났는지도 모르는 경우도 있었고요. (참전용사들에 대한) 고마움을 꼭 잊어서는 안 된다는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인터뷰하고, 평화롭게 잘 살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있었기 때문이니까요."
대구와 경북의 참전유공자는 2023년 2만 3천 명에서 2024년 2만 1천 명으로 줄었습니다.
6·25전쟁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들려줄 이들의 이야기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