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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근대 의료의 시작, 제중원

조선의 문호 개방과 대구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구는 '문화예술과 교육, 의료의 도시'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대구 사람들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대구에서 문화예술과 교육, 의료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조성된 여건의 힘이 컸다고 하는데요.

일제강점기 서울과 대구, 부산을 잇는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대구는 일제의 병참기지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지금의 북성로와 대구역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대구에는 일본인, 미국인 등 외국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당시 개화된 서구 문물이 대구에 퍼지기 시작합니다. 당시 서울을 제외하면 '북에는 평양, 남에는 대구'라고 할 정도로 대구의 위상은 높았습니다.

해방 이후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한국군과 UN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고 휴전이 된 이후에도 함경도, 평안도를 비롯해 서울·경기 등 전국에서 몰린 피난민들은 '종전'이 아닌 '휴전'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구와 부산에 살기 시작합니다.

전국에서 몰려든 피난민 가운데 지식인층들은 대구에서 활발하게 사회경제적인 활동에 나섰고 이들 덕분에 대구에는 다른 지역보다 많은 학교가 세워지고 그중에서도 특히 문화예술과 의료가 발달한 겁니다.


종교를 따라온 서양 의료
우리나라에 가톨릭이 전래한 것은 1784년 조선의 정조 때고 프로테스탄트, 개신교가 전래한 것은 선교사 알렌(Allen)이 입국한 1884년입니다.

가톨릭 신부와 개신교의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서양의 문물들도 따라 들어오게 되는데, 서양식 의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개신교보다 100년 먼저 이 땅에 들어온 초기 가톨릭은 '피의 역사'라 불릴 정도의 박해를 받으면서 대외적인 활동이 매우 제약적이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개신교의 선교사 알렌은 1884년 9월 20일 조선에 도착을 하는데 알렌은 선교사면서 의사였습니다. 1884년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해죠? 그해 12월 갑신정변이 일어나 민영익이 개화파의 칼에 맞아 빈사 상태에 빠지는데 이때 알렌이 서양 의술로 민영익을 치료하게 됩니다.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받은 알렌은 어의(御醫)로 임명되죠. 종교의 자유가 없던 조선에서 이는 기념비적인 사건이 됩니다.

1885년 알렌은 조정으로부터 병원 설립 허락을 받아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인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廣惠院)을 엽니다. 하지만 문을 연 뒤 13일 만에 '대중을 구제한다'는 뜻의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대구에서 시작되는 서양 의료
대구에 개신교 교회가 처음 시작된 것은 1893년 베어드(Baird) 선교사가 포교를 시작하면서부터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베어드 선교사는 남산동에 집을 구하고 한국말을 하고 한국 사람처럼 포교 활동을 벌이지만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구에도 의사이자 선교사인 존슨(Johnson)이 1897년 들어오는데 선교활동의 효과는 역시 크지 않습니다. 존슨은 미국에서 신약을 들여와서 1899년 7월 '미국약방'을 열고 진료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 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존슨은 대구 약전골목에서 '제중원'을 열게 됩니다. 당시 제중원 자리는 베어드 선교사가 1896년 대구성 남문 근처의 초가집 5채와 기와집 1채를 사들인 곳 가운데 기와집은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머슴들이 사용하던 초가집 한 채를 제중원으로 활용하게 됩니다.

원래 제중원은 국립, 그러니까 당시로서는 왕립 의료 기관이었는데, 서양 의사들과 조선 정부 사이의 갈등 때문에 1894년 9월 제중원의 운영권이 조선 정부에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이관됐기 때문에 왕립이 아니라 교회 부속병원처럼 운영이 되기 시작한 겁니다.


대구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
제중원이 문을 연 뒤 1년이 채 되지 않아 1,700명이 넘는 환자들이 몰렸고 수술 횟수도 50회가 넘는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환자가 늘자 존슨은 병원 확충에 나서 조선 청년들을 조수로 두고 의학교육도 했는데, 1908년 북장로회에 보고한 보고서에 따르면 존슨은 7명의 학생을 교육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현재의 동산병원 자리에 제중원 건물을 짓지만 태풍으로 무너지고 1906년 완공된 제중원에는 한 해 5,000명의 환자가 몰렸다고 합니다.


1910년 건강이 나빠진 존슨을 대신해 병원을 맡은 플레처(Flecher) 역시 의사 겸 선교사였는데 플레처는 제중원을 '동산기독병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대구와 경북의 나병 환자들을 돌보는 데 힘을 쏟습니다. 대구에 '애락원'을 만들어 당시로서는 전문 의료기관을 세우기도 합니다.

대구 최초의 일본인 의원은 제중원이 문을 연 뒤 5년 뒤인 1904년 문을 열었습니다. 대구성의 남문 근처에 야마와키 의원, 북문 근처에 나스 의원, 이렇게 두 곳이 문을 여는데 조선 사람들이 치료받는 일도 있었지만 주로 대구에 사는 일본인들 치료를 주로 했습니다.

이에 비해 제중원은 선교의 목적으로 대구로 온 선교사이긴 하지만 무료로 또는 싼값에 대구 사람들을 치료하고 체계가 잡혔다고 보기 힘든 기초적인 수준이긴 했지만 대구 청년들을 상대로 의료교육도 병행한 곳이라는 점에서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면서도 대구지역의 근대 의학 발달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하겠습니다.

필수 의료 논쟁이 뜨거운 요즘, 당장의 돈벌이도 좋고 '워라밸'도 좋지만 조선에서, 대구에서 의료가, 의사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어떻게 이어져 오고 있는지를 지금 의대생들과 전공의들도 조금은 이해하고 실천해 주길 바란다면 '꼰대의 욕심'(?)일까요?









김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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