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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국민보도연맹사건, 73년 만에 진실규명

◀앵커▶
한국전쟁 당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일반 시민들이 재판도 없이 경찰과 군인에게 학살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희생자 수만 최대 2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그중 예천 지역 일부 희생자들에 대해 진실화해위원회가 73년 만에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습니다.

김서현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경찰로 30년을 일하다 지난 2006년 정년퇴직한 뒤 고향 예천으로 귀촌한 74살 이용가 씨, 하지만 젊은 시절 경찰이 되는 길은 험난했습니다.

석연치 않은 이유로 순경 시험에 내리 3번 낙방했던 이 씨.

그제서야 어머니는 어렵게 입을 떼셨고, 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용가 예천 국민보도연맹 학살 희생자 유족▶
"총소리가 막 나고 끝나고 난 뒤에는, 소식이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렇게 된 거야. 그래서 우리 엄마가 새색시 아닙니까. 새끼줄에 묶여있는 걸 막 헤치고 피범벅이 된 걸 제치고 제치고 해서 (아버지 시신을) 끌어낸 거예요."

하지만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규명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행여나 경찰이 된 아들이 해를 입을까 염려한 어머니의 반대가 강했던 겁니다.

◀이용가 예천 국민보도연맹 학살 희생자 유족▶
"(어머니가) 일언지하에 '나는 꼴도 보기 싫고, 네가 현재 경찰에 있는데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하기 싫다는 거지. 아니, 또 그런 참혹한 일이 다가올지 예상을 못 하는 거지. 겁이 나서."

최근 진실화해위원회는 예천군에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주민들의 무고한 희생이 있었다고 인정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 12일, 인민군 1개 연대가 소백산을 넘어 예천까지 진입하자, 후퇴를 준비하던 국군과 예천 경찰이 보도연맹에 가입된 주민들만 따로 불러낸 뒤, 예천읍 고평리, 개포면 경진리, 용궁면 산택리 세 곳에서 총살한 겁니다.

"예천의 벼락고개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진실화해위 1기 조사에서 밝혀진 것만 40명이 넘는 마을 주민들이 이곳에서 무참히 살해당했습니다."

보도연맹에 가입된 좌익 활동 경력자들이 인민군에 동조할지 모른다는 이유가 컸지만, 소를 몰다 경찰에 살해당한 당시 22살의 이용가 씨 아버지처럼 평범한 농부도 적지 않았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예천지역 주민 10명이 집단 살해된 사실을 인정하고, 국가와 예천군에 사과와 명예 회복 조치, 추모 사업 등을 권고했습니다.

◀이용가 예천 국민보도연맹 학살 희생자 유족▶
"하도 감격스러워서 (결정서) 가져오면서 바로 용궁 마트에 가서 포 하나 사고 술 하나 사고 과일, 참외 하나 사고 해서 산소에 가서 간단히, 고유를 혼자, 혼자 했지. 그리고 눈물 좀 흘리고. 저절로 눈물이 나오데."

지금까지 예천에서 진실 규명이 결정된 보도연맹 희생자는 모두 69명이지만, 유족들은 최대 150명에 이른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적등본이나 조사보고서 등 기록이 많지 않아, 규명에 어려움이 큰 상황입니다.

◀이승희 예천군 용궁면 무이1리▶
"서류상 근거가 지금 없다 그러니까. 동네 사람 증언이나 가족 증언, 가족도 그런데 거의 없어요, 지금. 우리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형님까지 돌아가셨으니까.."

억울하게 가족을 잃었지만 다른 가족에게 폐가 될까 숨겨온 세월이 수십 년.

유족들은 더 늦기 전에 진실 규명과 추모 관련 사업에 속도가 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MBC 뉴스 김서현입니다. (영상취재 최재훈)

김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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