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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5.18 정신, "1980년"에 국한되지 않아…관련자 심의 기준 명확해야


'1980년'에 한정되지 않는 민주화운동
영화 '서울의 봄' 보셨나요?

이 영화가 흥행하면서 신군부 세력이 권력을 잡은 당시에 대한 관심과 공분이 높아졌죠.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전두환 등 하나회 멤버들이 중심이 된 신군부 세력이 군사 반란을 일으키고 권력을 잡는 1979년 12월 12일입니다.

이후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반발하는 세력을 탄압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한 것 또한 신군부의 만행이죠. 2023년 7월부터 12월 말까지 8차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신청이 시작됐습니다.

8년 만에 대상자를 확대해 재개됐는데요. 5.18 관련자를 1980년 당시로 한정하지 말고 군부 세력에 저항한 1980년대, 그 이후로 시간적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5.18 진상규명 외친 대구·경북의 대학생들
현재 경북 성주에 사는 류동인 씨는 1980년 5월 27일, 끝까지 전남도청을 지키다 계엄군 총에 숨진 류동운 열사의 동생입니다.

초, 중, 고등학교를 광주에서 다닌 류 씨는 1980년 5월의 광주를 목격했습니다.

81년에 대구로 온 이후에도 류 씨의 마음속에 응어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대구에 사는 많은 친구들이 진짜 광주에서 그랬냐고 물어봤어요. 그 당시에는 아무도 잘 안 믿으려고 했어요."

그리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학생 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요.

1985년 류 씨는 다른 학교 선배인 최윤영 씨 등과 대구에 있는 한 언론사에 화염병을 던져 방화미수 혐의로 구속됐고, 2년여 수감 생활을 했습니다.


류 씨는 "1985년에도 여전히 광주시민들은 폭도고, 그 사건은 폭동으로 불렀습니다. 도저히 이렇게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라면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졸업하고, 취직은 생각해 볼 수 없었다며, 지금은 덤덤하게 말하지만, 트라우마는 여전하다고 합니다.

"대구시경 대공분실에서 4박 5일 잠을 못 잤고, 학생 운동하는 선배들과의 관계 이런 걸 추궁당하면서 물고문도 당하고 그랬습니다."


1988년 11월에는 경남 합천에 있는 전두환 씨 생가가 불에 탔습니다.

5.18 폄훼, 5공 비리를 규탄한 대구의 대학생들이 주도했습니다.

당시 사건으로 처벌을 받은 남태우 씨는 "서울의 봄 같은 영화 한 편으로도 권력의 부당함을 알릴 수 있지만, 그때는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도 없었습니다. 시위라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별로 없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보수의 텃밭이라고 불리는 대구·경북에서도 민주주의의 가치는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었다고 했습니다.

"대구·경북은 다 신군부를 지지할 것이라는 착각을 많이 하거든요. 저희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런 면에서 저희가 이걸 알려야겠다는 나름의 사명감 같은 게 있었는데.. 이후 정치적으로나 개인사적으로 봐도 소위 말하는 대구·경북에서 민주화운동을 하신 분들은 굉장히 고초가 많았죠"

5·18 광주 민주화운동 8차 보상 신청 접수가 2023년 말까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이제는 50~60대가 된 류동인 씨와 최윤영 씨, 남태우 씨 등 1980년 5·18 이후 진상 규명, 신군부 퇴진을 요구하다 학사 징계, 강제징집 등을 당한 대구·경북지역 11명도 보상 신청을 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시·공간적 범위 확대해야
지난 2022년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면서 5.18 관련자 범위가 사망, 부상, 질병, 후유증과 이에 따른 사망자에서 해직자, 학사 징계자, 성폭력 피해, 수배, 연행, 구금된 사람까지, 확대됐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정의도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항하여 시민들이 전개한 민주화운동이라고 돼 있어 사실상 시간적 범위가 1980년 5월에 한정돼 있습니다.

지난 2011년 6차 보상에서 5.18 관련자 범위가 1988년 4월 1일까지 적용되는 등 세 차례에 보상에서 1980년 이후 사건 관련자 인정 사례가 있었지만, 여전히 시간적·지리적 범위는 명확하지가 않은데요.

5.18 왜곡 보도를 규탄하며 언론사 방화에 나섰던 최윤영 씨는 "5·18 광주의 진상 규명이라고 하는 것은 80년에 가둬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로 계속 신군부가 집권하는 동안 저항했다는 걸로 이어졌다고 봐야 하는 거죠."라며 그런 저항이 1980년대, 신군부 세력이 처벌받을 때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5.18 진상 규명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신청서를 받은 광주시 보상심의위원회는 5·18 관련성을 살펴보겠다는 입장인데요.

하지만 신군부 집권 당시 공소장과 판결문에 전두환, 5·18이란 표현을 적시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게 현실이라, 결국 심의위가 어떤 기준과 방향성을 갖고 보는가에 달렸는데요.

보상 신청에 나선 이들은 물질적인 보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최윤영 씨는 "물질적인 보상, 이런 것 같으면 저희가 신청하지 않았죠. 그것은 부수적인 문제이고 실제 저희의 저항이 정당했음을 역사적으로 인정받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 이것이 저희의 일차적인 목표입니다."

이들은 5·18 민주화 운동의 시간적 범위를 신군부가 처벌받기 전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요구를 국회에도 건의할 방침입니다.

김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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