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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와이드] 오월학교 부장 "5·18 당시 광주와 함께한 대구·경북 학생운동"

5·18 민주화 운동이 43주년을 맞았습니다. 지난 3월 31일에는 고 전두환 씨 손자 전우원 씨가 광주를 찾아 유족에게 사과를 한 소식에 많은 관심이 쏠렸는데요, 박진우 5·18 기념재단 오월학교 부장 모시고 5·18 정신의 의미와 1980년 당시 광주와 함께했던 대구와 경북 지역의 학생 운동 상황을 들어보는 시간 마련했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5·18 기념재단에서 교육 사업을 담당하는 곳입니다. 오월학교 박진우 부장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박진우 5·18 기념재단 오월학교 부장]
예, 안녕하십니까?

[김상호 사회자]
5월 18일. 5·18 민주화운동 43주년이 됩니다. 오늘 모셨으니까 5·18 정신 한마디로 무엇인지 먼저 말씀 듣고 다른 질문드리겠습니다.

[박진우 5·18 기념재단 오월학교 부장]
저는 평상시에 '사람이 사람에게 기적이 되었던 5·18'이라고 좀 표현을 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요. 먼저 1980년 5·18 당시에 열흘간의 항쟁에서 정말 갑작스럽고 경악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서로 헌혈하고 주먹밥을 나누고 또 시신을 수습했던 모습이 하나의 저는 기적이었다고 생각하고요. 두 번째는 80년 5월 광주에라는 공간, 시공간적으로 달리 있었지마는 나중에 광주의 소식을 접하고 광주를 돕고자 했고 또 5·18의 진실을 규명하고자 했던 부분에 있어서 그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전 처음 듣는 표현이지만 굉장히 잘 광주를 한마디로 정리해 주시는 말씀인 것 같은데, 최근 또 관심이 쏠렸던 내용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광주를 그런 상황으로 몰고 갔던 주범이죠, 고 전두환 씨. 이분은 사과 없이 돌아가셨는데 그 손자이신 전우원 씨가 광주를 찾아서 할아버지 대신 나라도 사죄하고 싶다고 해서 유족들을 만나서 사죄했습니다. 먼저 이거 어떻게 평가하시고 보시는지요?

[박진우 5·18 기념재단 오월학교 부장]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한 마디 사죄 없이 떠난 전두환, 전우원 씨의 할아버지가 되겠죠, 할아버지 대신해서 전우원 씨가 지난 3월 31일 제가 근무하는 5·18 기념재단에 왔습니다. 무릎을 꿇고 사과했습니다. 80년 당시에도 태어나지 않았던 전우원 씨지만 전두환 일가 중에 최초로 사과를 한 겁니다. 그런 것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또한 준비는 좀 해왔다는 생각에 들었어요. 그냥 온 게 아니고 뭔가 마음의 준비를 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두 가지 측면이었습니다. 하나는 무릎 꿇고 자신의 외투를 벗어서 돌아가신 분들의 묘비를 닦았던 모습도 있었고요. 또한 하나는 방명록에 '저라는 어둠을 비추어 밝혀주셔서 감사하다'는 유족분들에 대해서 남겼던 말씀인데요. 더 놀라웠던 것은 전우원 씨도 놀라웠지만 그 전우원 씨의 사과를 받아줬던 광주의 유족들, 안아주면서 "잘 왔다" 그리고 "건강해라, 밥 사주겠다, 힘내라" 이렇게 응원했던 그 어머님들의 모습에서 굉장히 놀라웠던 모습하고요. 이게 진정어린 사과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어떤 의미에서는 그동안 맺혀 있던 응어리가 한 걸음 그래도 풀리고 한 걸음 더 화해하고, 그다음에 광주 분들이 갖고 계셨던 전두환 씨에 대한 응어리가 다소라도 풀리는 듯한 느낌을 받으셨나요?

[박진우 5·18 기념재단 오월학교 부장]
예. 사과하지 않은 채로 죽음을 맞이한 전두환을 대신해서라도 누군가가 그에 대해서, 그 일가족이 사과했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상호 사회자]
이런 진전이 있는 한편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전광훈 목사를 비롯한 일부 극우세력들은 여전히 광주를 폭동으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폭동이라고 폄훼, 왜곡하고 아직도 본인들의 주장이 정확한 주장이고 그동안 어렵게 밝혀냈던 많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실제 얘기들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왜곡을 여전히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시는지요?

[박진우 5·18 기념재단 오월학교 부장]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5·18 민주화운동 국가기념일이 되었고 그 기록물들은 보편적 가치로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가 돼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 일부에서 왜곡과 폄훼를 일삼고 있어서 안타까운데요. 제 생각에는 이게 물질적이든 정치적이든 간에 폄훼, 왜곡함으로써 그들이 얻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렇게 계속해서 왜곡을 일삼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5·18로 인해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가슴을 후벼 파도 처벌을 받지 않는 동안 현실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상호 사회자]
방금 말씀하신 내용 중에 그들이 뭔가 얻는 게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이 이런 주장을 통해서 얻는 게 무엇이길래 이런 주장을 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박진우 5·18 기념재단 오월학교 부장]
이런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 5·18에 대한 폄훼했을 때 이게 유튜브로만 생중계가 되잖아요? 그러면서 그들이 얻는 수익들이 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련된 왜곡된 도서를 또 그와 동조하는 분들한테도 판매하면서 얻는 수익들이 있는 것 같고요. 지만원이란 분이 재판을 이렇게 받았을 때도 유튜브라든가 그런 부분이 있어서 생방송으로 나갔을 때 그 수익들이 금방금방 모아졌던 것들이 바로 현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우리 박진우 부장님, 그렇게 돈이 모이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이런 마음이 참 뭐라고 표현할까요. 보고 있으시면 참담한 마음도 드실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박진우 5·18 기념재단 오월학교 부장]
저도 참담한데요. 5·18로 인해서 가족을 잃은 그 유족들, 그리고 구속되었던 분들이라든가 부상자들이 봤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나 5월이지 않습니까? 바로 다음 주가 5·18 43주년인데 이런 왜곡, 폄훼가 계속된다는 것은 2번, 3번, 그 이상의 아픔을 계속해서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상호 사회자]
그러지 않아도 아픈데 상처에다가 더 아픈, 치료하기도 부족한 시간인데 물론 여러 가지 보완적인 치료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전우원 씨 같이 사죄를 해서 한 걸음 화해와 치료의 길로 치유의 길로 나아가는 방향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이런 분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들을 추동하는 가장 큰 원인은, 이유는 금전적인 수익일 것으로 추측하시고 계시는데요.

자, 그러면 이들이 이렇게 왜곡하고 있는 내용들이 과연 맞는지 한 번 짚어보죠. 특히나 우리 대구 지역을 보수의 심장이라고 그래서 오히려 그렇게 지금 말씀하신 데 광주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분들이 가장 많은 지역으로 그것 역시 왜곡이고 폄훼일 수 있는데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대구 역시 그렇지 않았다는 거에 대해서 오늘 말씀을 좀 해 주실 것 같은데요. 80년 대구 봄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해 주십시오. 80년 대구의 봄일 때 대구는 그 당시 광주가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대구의 봄은 어땠습니까?

[박진우 5·18 기념재단 오월학교 부장]
참 재밌는 상황이죠. 대구분이 아니고 광주에서 온 제가 대구의 봄을 이야기를 하러 왔습니다. 대구의 5·18을 제가 이야기를 하러 왔습니다. 당시 경북대학교 복학생으로 시위를 주도했던 선생님의 그런 증언에 의하면 5·18 전의 민주화의 열기는 서울, 대구, 광주 순위로 할 정도로 대구에서 그런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다고 합니다. 실제로 당시에 신군부는 대구의 격렬한 학생 시위를 이유로 5·18 전에, 80년 5월 15일에 전국 최초로 대구·경북 지역의 대학생들에게 휴교령을 내려버립니다. 바로 인터넷 검색 가능합니다. 5월 15일 자 조선일보에 보면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휴교령을 맨 먼저 내려준 것이 계명대학교로 휴교령이 내려지고 차츰 대구·경북 지역의 대학에 휴교령을 내려버립니다. 그리고 5·18 비상계엄 확대 조치가 또 발표되기도 했었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광주가 가장 격렬해서 광주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고 그 당시의 서울에서도 활발했었고 대구가 광주보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학생들의 저항 운동 민주화 운동은 훨씬 더 열기는 뜨거웠다?

[박진우 5·18 기념재단 오월학교 부장]
그렇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그래서 휴교령도 빨리, 전국 최초로 빨리 내려진 데가 대구였는데, 그런데 실제로 일은 광주에서 벌어졌습니다. 벌어진 광주의 일들을 대구에도 전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들이 있었을 것 같은데 그 내용들이 우리 지역에서 알려진 것보다는 그래도 5·18 재단에서 갖고 계신 게 여러 자료가 있을 것 같은데 소개를 좀 부탁드립니다.

[박진우 5·18 기념재단 오월학교 부장]
대구의 학생들은 5·18 광주 상황을 접하고 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5월 22일 광주 참상을 알리는 유인물 제목을 제가 보겠습니다. '광주 시민에게 고함'이라는 유인물을 만들어서 대구 시내의 곳곳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5·18 열흘간의 항쟁이 광주에서 끝난 뒤에도 대구·경북 지역에서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과 전두환 등 군부를 비판하는 유인물들을 곳곳에 뿌리면서 그 과정에서 구속되기도 했었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그 과정에서 모진 고문을 받기도 했다는데요. 사례를 소개 좀 해 주시죠.

[박진우 5·18 기념재단 오월학교 부장]
사실은 제가 이분을 알리려고 온 것도 있습니다. 그런 참상을 알렸던 분 중에 반드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분이 있습니다. 경북대학교 역사교육과 80학번, 그러면 1학년입니다, 1학년인데요. 역사교육과 80학번 1학년이라는 것은 지금처럼 임용고사가 있는 게 아니라 졸업하면 선생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살아계셨다면 지금 정년을 맞이하셔서 편하게 사실 수 있는데 5·18을 접하고 나서 광주의 참상을 적은 유인물을 가지고 대구 시내에 뿌렸고요. 군부에서 잡혀갑니다. 심한 고문을 당합니다. 고문 결과 이분이 정신 질환을 앓게 됩니다. 그리고 대학 생활도 잘 못하고요. 군대에 갔지만 또 의가사 제대했고요. 그 뒤로 가족들에게 같이 살면 피해를 줄까 봐 혼자 사시다가 고독사를 당했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당시 80년 당시에 경북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권순형 씨의 사례를 말씀해 주셨는데, 이분 사례 말고도 대구에 또 다른 사례, 여러 사례가 있다죠?

[박진우 5·18 기념재단 오월학교 부장]
또 한 분을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경북 영주 출신의 서강대생이었고요. 김의기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광주의 참상을 직접 눈으로 봤습니다. 그리고 5월 17일 5·18이 끝나고 나서 서울로 올라갑니다. 서울 기독방송회관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유인물을 뿌린 다음에 진실을 말하지 않는 국가를 대신해서 자신의 몸을 던져서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과정에 또 사망했었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지금 대구·경북 지역에 신군부에 끌려가서 고초를 당하신 분들, 인원이 어느 정도로 파악됩니까?

[박진우 5·18 기념재단 오월학교 부장]
이게 신문 기사로도 뉴스화 되기도 했었는데요. 2020년 기준으로 해서 76명 정도가 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숫자상으로 한정된 거고, 계속해서 그런 피해를 당하셨던 분들 함께 하셨던 분들이 더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대구·경북 지역이 원래 다른 다큐멘터리에서도 많이 다뤘습니다만, 대구·경북이 원래 야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인데요. 1980년 5월 18일 이후부터 83년 12월에 학원 자율화 조치가 있었습니다. 이때까지 이 기간에 기성 언론과 지역 대학신문, 대학의 언론과는 논조 내용에 많은 차이를 보여 왔던 것 같은데 이 내용을 좀 소개해 주실까요?

[박진우 5·18 기념재단 오월학교 부장]
방금 말씀하셨던 학원 자율화 조치 이전이라는 것은 학교 내에 경찰들이 상주하는 겁니다. 그래서 학생들 모임 자체도 잘 안됐고 학내 언론에서 광주 이야기, 5·18 이야기하면 다 검열에 걸리는 식입니다. 그런데도 직·간접적으로 5월을, 광주를 또 이야기했던 건데요. 예를 들어서 서울대학교 대학신문 같은 경우는 5·18 1주기였던 81년 5월에 광주 사태, 지금은 광주 사태라 안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용어도 썼습니다, 민족의 비극을 잊을 수 없다는 표현을 썼고요. 충북대 신문에서는 만화를 이용해서 또한 그런 마음을 표현했었고요. 부산대 신문에서는 오월순례라는 시로 광주를 향한 마음, 매년 돌아오는 5월은 광주를 향할 수밖에 없다는 그걸 표현했던 시가 또 쓰였고요. 경북대학교에서는 83년도에 만평회가 새장에 갇혀있는 그 새, 그러니까 학생들의 그러한 것을 억압하는 모습들을 또 만평으로 표현하기도 했었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지금 말씀하셨지만 87년 이후, 그러니까 헌법이 바뀌어서 직선제로 바뀌기 이전에 87년 6월 항쟁까지 학원 자율화 이후에도 사실은 대학 내에서 대학 언론이나 대학에서 발언하는 내용들이 실제로 사법 경찰이 들어와서 사학 내에 있었으니까요. 말하기가 참 쉽지 않았을 텐데 그 와중에도 대학 언론들은 이런 얘기들을 많이 해왔다는 겁니다. 대구 지역에서도 이런 활동들이 계속 지속이 되었을 것 같은데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을 오해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분이 불과 얼마 전까지도 심지어는 우리 앞에서 말씀 나눴지만 지금도 이걸 왜곡하고 폄훼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 당시는 굉장히 심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진상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대학생들이 특히 많이 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지역에서 특히나 대학생들이 광주를 알리기 위해서 했던 노력, 소개를 좀 해 주신다면요, 어떤 게 있을까요?

[박진우 5·18 기념재단 오월학교 부장]
학원 자율화 조치 이후 84년부터 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학내에 있던 경찰들이 밖으로 나가고요. 해직됐던 교수님들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쫓겨났던 학생들이 다시 복적했습니다. 그리고 5·18에 대한 광주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더 다양화되는 지점이 있었는데요. 85년도에 경북대에서 5·18에 대한 추모와 진상 보고 대회를 경북대에서 진행했습니다. 2020년에 한 게 아니고요, 85년도에 먼저 했었고, 영남대에서도 또 반독재 민주화 투쟁위원회를 85년 같은 해에 또 진행했었습니다. 그리고 5·18 민주항쟁 관련된 학술발표대회라든가 진상 보고대회가 있었고, 여기에는 영남대, 경북대, 계명대, 대구대 학생들이 주축이 돼서 추모도 했다는 것을 기사로 볼 수 있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2022년 5·18 앞두고 대구에서 한 판결이 있었는데 굉장히 주목할 만한 판결이 있었습니다. 불법 구금, 고문했다고 인권침해 했다고 인권침해를 당한 대구·경북 5·18 유공자 7명에 대해서 국가가 정신적 손해를 배상하라고 판결이 나긴 났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과제가 남아 있다고 전해지는데 이 내용은 어떤 겁니까?

[박진우 5·18 기념재단 오월학교 부장]
말씀하신 것처럼 5·18 유공자와 그 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해서 손해배상청구를 했습니다. 군부 세력에 저항하는 시위와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고 구금되었습니다. 고문으로 인한 신체적 피해와 후유증, 그리고 사회적 낙인에 시달려야 했던 그 피해를 국가가 또 책임져야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후 헌법재판소는 정신적 손해배상을 규정하지 않은 채 국가배상청구권을 금지한 5·18 보상법이 위헌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관련 소송들이 실질적으로 배상으로까지는 이루어지지 않고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속적인 사찰과 감시는 증거가 없다고 또 인정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이 포함되지 않았던 겁니다. 또한 구금 일수만 고려한 손해배상을 산정해서 당사자분들이 좀 아쉬움이 남았던 것 같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완벽하게 그분들이 겪었던 고초에 대한 제대로 된 충분할 만큼의 판결은 아니었다는 말씀을 주신 것 같은데, 이런 일들을 그냥 하나의 판결에 기대지 않고 또 다른, 아직 기다리고 계신 많은 분이 계실 것 같습니다. 이분들에 대한 피해보상에 대한 제도적인 보완책 같은 게 있으면 어떤 게 있을까요?

[박진우 5·18 기념재단 오월학교 부장]
90년 초에 이미 5·18 관련된 문제 해결에 있어서 원칙이 제시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진상규명이었고요. 두 번째는 책임자에 대한 처벌, 그리고 피해 보상, 네 번째가 명예 회복, 그다음이 기념사업인데요. 하지만 여전히 선행되어야 했을 그 진상규명과 그에 따른 책임자의 처벌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는 해결되지 못한 시점입니다. 그리고 5·18 관련 유가족 부상자분들의 아픈 마음에 함께 하는 것은 진상 규명이 제대로 되는 것이고 그에 따른 사회적 편견이 사라지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5·18로 인해 광주와 대구에서 아픔을 겪었던 분들에 대해 사회적 편견이 아닌 눈물로든 마음으로든 함께 손 잡아주고 울어 줄 수 있는 사회적인 것이 마련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가능하다면 5·18 민주화 운동이 헌법 전문에 좀 담겨서 폄훼와 왜곡이 사람들 사이에서 없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상호 사회자]
어떻게 보면 5·18 정신이 가지고 있는 내용 다시 한번 정리를 해서 우리가 어떤 내용을 계속 지속적으로 정확하게 밝히고 전승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결론을 겸하여 오늘 말씀하신 것 정리를 한번 해 주실까요?

[박진우 5·18 기념재단 오월학교 부장]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5·18은 광주에만 국한된 게 아니고, 1980년에만 국한된 게 아니고, 나중에 광주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서, 또 5·18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서 대구에서도 그런 활동을 펼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5·18이 가능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5·18은 불의에 맞서 진실을 밝히고자 했던 과정과 또 편견을 극복하는 민주화 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가 된 역사를 포함하고 있어서 국내적으로 보편적 가치가 있는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정신을 지속하고 알리는 것이 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구에서도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김상호 사회자]
오늘 여러 말씀 중 5·18 정신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정신, 광주 지역에서 벌어졌던 일이지만 그 일 속에 담겨있던 내용들은 앞으로도 우리가 안에 있는 고견의 내용을 빼서 잘 지키고 전승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헌법 전문에 광주 정신이, 5·18 정신이 담길 수 있는지 잘 지켜보도록 하고 함께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박진우 5·18 기념재단 오월학교 부장]
감사합니다.

이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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