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5·18 광주 민주화항쟁이 올해로 42주년을 맞습니다.
신군부 세력에 의해 고립된 채 불꽃처럼 타올랐던 그날 광주의 모습.
하지만 5·18을 광주라는 한 지역의 일로 국한해서 여기는 분위기가 아직도 있습니다.
광주 사람들만의 외로운 기억이 되지 않도록 경북에서 오월 정신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윤소영 기자가 만나봤습니다.
◀기자▶
신군부의 탄압으로 언론조차 광주의 참상을 외면했던 1980년 5월.
22살 신학생이었던 김학록 신부는 안동에서 유인물을 뿌리며 신군부가 그렇게 숨기려 했던 비극의 현장을 경북 주민들에게 알렸습니다.
광주의 대학생들이 손글씨로 꾹꾹 눌러쓴 유인물에는 광주의 참혹함이 고스란히 담겼고,
전국 각지 신부들의 도움으로 김 신부의 손까지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김학록 신부 안동교구▶
"학생들부터 임신한 사람 관련 d기들, 여러가지 잔혹한 일들이 (유인물에) 나와있었어요, 당연히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에요."
정부의 탄압, 그리고 영호남간 해묵은 지역감정은 광주의 진실을 경북에 알리는데 큰 걸림돌이 됐습니다.
그러나 김 신부와 천주교 안동교구는 포기하지 않고 경북 곳곳에서 관련 사진전과 비디오 상영회를 꾸준히 진행했습니다.
이런 노력은 결국 1988년, 경북지역 시민 900여 명이 처음으로 광주를 방문해, 외롭게 싸웠던 그들의 아픔에 손 내밀 수 있었던자양분이 됐습니다.
◀김학록 신부 안동교구▶
"상주 지역의 신자들이 그래도 사진전을 통해서 광주의 진실을 일찍 깨달을 사람이 많았던 거에요. (기록을 보면) 광주 지역 사람들의 너무 좋아하고, 고마워했다고···"
고향인 전남 담양을 떠나, 안동에 30년 넘게 뿌리내린 차명숙씨는 항쟁 당시 광주에서 직접 마이크를 들었습니다.
침묵하던 언론을 대신해, 광주 시민들에게 신군부의 만행을 자세히 전했습니다.
◀차명숙 5·18 당시 가두방송▶
"군인들이 조선대학교 뒤에 굉장히 많이 와있다, 경찰과 군인이 방송국을 장악하고 있다, 이걸 알려야한다, 그게 시작이 된 거에요."
42년이 흘렀지만, 광주의 거리를 채웠던 시민들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합니다.
◀차명숙 5·18 당시 가두방송▶
"죽은 아이들이 있잖아요. 그 죽은 아이들은 정말 누나 광주를 지켜야하지? 군인들이 도망가겠지? 경찰이 우리 지켜주겠지? 군인들 다 나갈때까지 열심히 하자···"
결국 경찰에 체포돼 교도소에 수감됐던 차 씨.
이후 남편 고향인 안동으로 이주한 뒤에도 지역에서 쉬지 않고 5.18 행사를 꾸려왔습니다.
◀차명숙 5·18 당시 가두방송▶
"인권, 정의, 사회, 공동체를 주장할 수 있는게 오월의 정신이에요, 그리고 미얀마 사건도 터졌잖아요. 아시아, 전세계가 함께 인권을 부르짖을 수 있는 사건이고···"
518 민주화항쟁을 둘러싼 진실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들의 손을 놓지 않기 위한 영남에서의 노력은 광주의 5월 정신을 이어가는데 큰 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MBC 뉴스 윤소영입니다. (영상취재 임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