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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보니] "내 아들처럼 불행한 일 겪으면 누가 소방관 되겠습니까?"

26년 전 금호강에서 실종된 여중생 3명을 찾다 급류에 휩쓸려 순직한 소방관이 있습니다. 고 김기범 소방교인데요, 순직한 아들을 기리기 위해 평생 모은 5억을 국가유공자 후손들에게 장학금으로 사용하라고 기탁한 고 김기범 소방교 아버지 김경수 씨를 만나봤습니다.

Q. 26년 전에 금호강에서 순직한 아들을 기리기 위해서 아버지는 평생 모은 재산 5억 원을 장학금으로 기탁했습니다. 그 아버지를 만나러 군위에 왔습니다. 아버님, 안녕하세요?

A. 예, 안녕하세요?

Q. 어떤 마음으로 기탁하시게 되셨나요?

A. 이 계획은 오래전부터 했습니다. 순직한 아들 단 하나뿐인 아들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내 마음을 그렇게 굳혀 먹었습니다. 내가 이 아들을 위해서 참 보람 있게 써야 하겠다는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Q. 고 김기범 소방교는, 그러니까 아드님은 아버님께 어떤 아들이었나요?

A. 나한텐 아주 중요한 아들이었죠. 결혼해서 그거 하나 낳아서 그때 당시만 해도 산아 제한 처음 생길 때예요. 내가 춘천에 살 땐데 그래서 아이 하나만 놓고 치우겠다고 그랬습니다.

내가 고생하며 컸기 때문에 이 아들은 내가 호강시키고 키워 보겠다 하는 그런 욕심이었지요.

Q. 소방관이 된다고 하셨을 때 조금 더 말리셨을 것 같기도 한데···

A. 많이 말렸지요. 위험하다, 하지 마라, "절대로 안 위험하다"고 하는 거예요. 많이 말렸습니다. 엄마도 위험하다고 하지 말라고 하고, 절대로 하면 안 된다고 그랬는데, 다 큰 아들 멱살 잡고 매일 말리고 다닙니까?

시험 쳤다고, 1등으로 됐다고 하더래요. 1등 됐다고 하니 됐는가 보다··· 좋아하지도 않았어요.

Q. 아드님이 그렇게 순직하시고 나서 그 이후의 삶이 사실은 마음이 편하지는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A. 네,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죠. 항시 일을 해도 머릿속에는 그 아들이 매일 맴돌았죠. 우리 집사람은 내가 걱정한다고, 아마 말은 안 해도 나보다 더 심정은 더 했겠지요. 아들 그거 하나 키우면서도 애지중지하면서 키웠어요.

Q. (아드님) 생각이 나실 때는 보통 어떻게 하셨나요?

A. 생각은 나도 할 수 있습니까? 없는데 뭐 생각하면 뭐 합니까? 뭐 딴생각은 안 하고 일 부지런히 해서 돈을 모아야 하겠다 하는 그거 한 가지죠.

(아들이) 가고 난 다음부터는 내가 이 아들 이름을 한번 남겨야 하겠다, 하는 그런 생각으로 (돈을) 모았죠. 하루에 담배 한 갑, 이틀에 한 갑, 사흘에 한 갑 피우는 것도 그 담배, 돈 그게 아까워서··· 그거 외에는 돈 써본 적이 없어요.

먹고 싶은 거 안 먹고 모으는 거 그거죠 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커피 한 잔에 4천 원, 5천 원 하지 않습니까? 집에서 봉지 커피 한 잔 타 먹으면 몇 푼 듭니까? 그러니 커피 좀처럼 밖에서는 잘 안 먹죠. 먹고 싶으면 집에 와서 먹고, 돈 천만 원만 되면 무조건 은행으로 가는 거예요. 은행으로 가서 은행에 넣고 그렇게 모았습니다. 1억이 넘으면요, 그게 새끼 치고 해서 돈 모으기가 쉬워요.

Q. 그때 천만 원이 딱 모였을 때 아버님께서는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A. 흐뭇하죠. 뭐, 제 생각이 좋죠. 내 생각에 참 좋죠.

(내가) 언론에 발표되는 걸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싫어하는 사람이라 그저 돈만 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내가 모르는 사람이 언론에까지 알려서 하니까 그게 아주 마음에 안 들었어요. 우리 아들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생각을 많이 하고 하는 건 좋습니다마는 저는 그런 걸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어요. 오직 내 아들 이름 하나 남기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지요.

Q.아들의 마지막 모습은?

A. 아들이 휴가 와서 휴가 마치고 가는 날 저녁에 비가 많이 왔어요. 그래서 그 길로 가서 사고가 났습니다. "아빠, 내가 가도 되겠나? 가도 되겠나?" 뒤돌아보고 차를 끌고··· "그래, 여기 걱정은 하지 말고 가거라"

(사고) 당일에는 우리 과수원에 물이 막 꽉 차 가지고 그 물 빼내고 남아있는 물 퍼낸다고 부부가 물 퍼내고 있으니까 이웃 사람이 와서 "(아들 사고 난) 소식 들었나?" "소식 못 들었다" 하던 일 내려놓고 택시 불러 타고 대구에 가니 이미 사람은 죽어있는데, 세 명이나 (병원에) 눕혀져 있는데···

 Q. 그날 그 사건 현장의 영상을 찾은 게 있는데 그 아드님께서 인터뷰를 해 주셨더라고요.

 <1998년10월1일 뉴스데스크>

숨진 구조대원 가운데 26살 김기범 소방사는 수색 작업을 취재하던 대구문화방송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습니다.

"중간에 걸렸을 가능성은 전혀 없을 것 같고요. 끝까지 내려가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A. 내 아들입니다. 아주 강한 아이였어요. 참말로 남들이 뭐라고 하면 "누구 아들인데?" 내가 그런 소리도 했어요.

Q. 소방서나 정부에 바라시는 말씀도 있을까요?

A. 소방서에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습니다. 나는 내 아들 간 이상 내 아들처럼 불행한 일만 안 겪게 하면 제일 좋지요. 내 아들처럼 불행한 일 겪으면 누가 소방관 되겠습니까? 아무도 소방관 안 하죠. 소방관 자녀들은 절대로 소방관 하면 안 됩니다.

Q. 왜 그럴까요?

A. 내 아들처럼 될까 봐 그러죠. 문경 소방서 소방관 (순직 사고 소식을) 내가 TV로 보았어요. 저 사람 부모도 나처럼 가슴을 많이 태우겠구나! 그런 생각도 했지요.

Q.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A. 이제 몸 편히 잘 있으라고. 내 너한테 할 만큼 했다. 할 만큼 했다. 그러니까 아들은 몸 편히 잘 있어라. 좋은 데 간 모양이야. 죽어서 생전 내 꿈에도 안 나타나는 거 보면 좋은 데 갔네··· 

윤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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