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대한민국은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정보통신망법 개정을 통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배액 배상제) 도입을 놓고 격렬한 논쟁에 휩싸였습니다.
이 법안은 언론의 허위 조작 보도를 넘어 유튜브, 커뮤니티 게시물 등 인터넷상의 모든 허위 조작 정보를 규제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언론의 책임과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를 동시에 시험대에 올리고 있습니다.
이 논란은 단순히 법안 통과 여부를 넘어, 허위 정보가 넘쳐나는 디지털 시대에 진실의 가치와 언론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지고 있습니다.

논쟁의 시작: 정치권의 전략적 선회
민주당의 이번 법안 추진은 ‘언론 개혁’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당초 민주당 언론개혁특위는 언론중재법 개정을 통해 언론의 허위 조작 보도를 규제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9월 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언론 말고, 유튜브 하면서 일부러 가짜 뉴스 해놓고 관심 끈 다음 슈퍼챗 받고 조회수 올리면서 돈 버는 곳이 있다”며 “언론이라고 특정하지 말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뒤 논의의 무게추는 언론 보도에만 국한되지 않는 정보통신망법으로 급선회했습니다.
이는 ‘언론 탄압’이라는 프레임을 피하면서도 허위 정보 유통을 강력히 막겠다는 정치권의 전략적 선택으로 풀이됩니다.
법안의 주요 요건은 허위성, 허위임을 인지한 ‘고의·악의’, 피해 발생입니다.
당초 논의되었던 ‘중대한 과실’ 개념은 이 대통령의 지적에 따라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같은 법안의 방향 수정은 언론계와 학계의 우려를 일부 반영한 것으로 보이지만, 근본적인 논란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특히 '고의·악의'를 입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고, 모호한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언론·시민사회·학계의 목소리
법안을 둘러싼 논쟁은 최근 열린 여러 토론회에서 그 복잡성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법안의 절차적 문제부터 실질적인 효과, 그리고 언론의 자정 노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쟁점들을 심도 있게 논의했습니다.
'자유언론실천재단', '새언론포럼', '언론시국회의', '언론개혁정책집단 세움'이 지난 11일 공동으로 주최한 토론회는 민주당의 '속도전'에 대한 강한 비판이 주를 이뤘습니다.
발제자 이강택 세움 연구위원은 배액 배상제 도입을 "고강도 처방"이라 규정하며, 성급한 입법이 "뒷날 반민주적인 세력에게 악용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이 연구위원은 더불어민주당의 논의가 미국식 징벌적 손해배상제에 대한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국은 명예훼손 형사처벌이 없는 대신, 공적 인물에 대한 보도에 대해 ‘허위임을 알았거나 진실을 무모하게 무시하였다는 실질적 악의(Actual Malice)’가 입증될 때만 배상이 가능합니다.
또한 허위 보도도 어느 정도 보호하는 ‘숨 쉴 수 있는 공간(Breathing Space)’을 허용해 언론의 자유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강택 연구위원은 명예훼손에 대한 형사 처벌이 이미 존재하는 한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 폐지 등 기존 규제와의 조화를 우선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관훈클럽과 한국언론학회가 9월 17일 공동으로 개최한 세미나는 ‘언론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주제로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가져올 부작용과 언론 스스로의 문제를 동시에 짚었습니다.
발제자들은 배액 배상제가 권력자의 ‘입막음 소송’으로 이어져 권력에 대한 의혹 보도가 위축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윤석민 서울대 교수는 "정치권력 주도로 언론을 개혁해야 한다는 것은 권력에 의한 언론 통제와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하며, 언론이 민주주의의 걸림돌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행태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윤 교수는 언론의 위기는 기술 발전에 제대로 혁신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또한 정은령 세명대 교수는 언론 스스로의 책임을 강조하며, 언론사 내 팩트 체크 기능이 약화한 현실을 꼬집었습니다.
그녀는 속보와 수익에 대한 압박이 언론사들의 ‘의견 팔이’와 ‘기계적 중립’을 부추긴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이는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이 법적 문제 해결을 넘어, 저널리즘의 근본적인 신뢰 회복이라는 더 큰 숙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언론단체들은 법안의 졸속 입법을 막기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섰습니다.
지난 17일, 방송기자연합회와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기자협회, 한국PD연합회 등 언론 현업 4단체는 민주당 정청래 대표를 비공개로 만나 법안 처리 일정을 늦춰달라고 공식 요청했습니다.
이들은 민주당 언론개혁특위가 목표로 했던 ‘9월 25일 법안 처리’가 사회적 논의를 제약한다고 주장하며, 졸속 입법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습니다.
노종면 의원은 면담 후 기자들에게 언론단체들이 "명예훼손 등 다른 문제도 함께 논의했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요청했다고 밝혔습니다.
한편 법조계에서도 졸속적인 징벌적 손해배상제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손지원 커뮤니케이션법연구소 대표(변호사)는 최근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의 발화 행위 자체에 특수한 손해배상 원칙을 적용한다는 것 자체가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퇴행시키는 방향”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손 대표는 “현실에선 의견 표명인지 사실적시인지 모호해 구분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의혹 보도와 악의적 허위 보도를 구분하기도 어렵다”며 “고의 추정 요건을 포함하게 되면 고의가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으면 고의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우려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징벌적 배상제의 딜레마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언론의 자유와 책임이라는 두 가지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우리 사회에 복잡한 질문을 던집니다.
해외 사례로 본 명과 암
민주당은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의 명분으로 미국식 제도를 언급하고 있지만, 해외 주요국 사례를 깊이 들여다보면 한국의 상황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은 명예훼손 형사처벌이 없는 대신, ‘실질적 악의’가 명확히 증명됐을 때만 징벌적 손해배상을 인정합니다.
또한 권력자가 비판 발언을 억누르기 위해 제기하는 전략적 봉쇄소송(SLAPP)을 막기 위한 ‘안티 슬랩법’을 두고 있습니다.
반면 유럽연합(EU)은 언론 대상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아예 없습니다.
대신 디지털서비스법(DSA)과 유럽미디어자유법(EMFA)을 통해 플랫폼의 책임을 강화하고, 언론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해외 사례들은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형사처벌과 같은 이중 규제와 결합할 경우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위축시킬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권력층 배제 논란: 언론 위축 vs. 명분 없는 논리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둘러싼 가장 첨예한 쟁점은 ‘권력층’의 배액 배상 청구권 허용 여부입니다.
언론계는 권력자들이 징벌적 손해배상 소송을 언론 탄압의 무기로 삼을 수 있다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9월 11일 개최된 '언론개혁정책집단 세움' 등의 토론회에서 한국PD연합회 김재영 회장과 언론노조 김도원 위원장은 언론의 ‘위축 효과’를 우려하며 권력층을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언론인권센터 김준현 변호사는 "미국에서 공직자에 대한 탐사보도를 해서 진 적이 거의 없다"며 '위축 효과' 주장이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반박했다.
그는 언론계가 더 설득력 있는 논리를 개발해 주길 주문했습니다.
언론 보도의 피해자들은 징벌적 배상제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전국건설노조 김준태 교육국장은 고 양회동 열사 관련 보도를 예로 들며, '건폭몰이'와 같은 악의적 보도에도 마땅한 구제 수단이 없었다고 호소했습니다.
양 씨는 2023년 5월 1일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 앞에서 윤석열 정부가 정당한 노조 활동을 '건폭(건설 현장 폭력 행위)'으로 몰아가며 탄압한다며 항의하며 분신해 숨졌습니다.
유족들은 무리한 수사로 양회동 씨를 죽음으로 내몬 경찰, 유족 동의 없이 분신 장면 CCTV를 유출한 검찰, 이를 활용해 '분신 방조' 의혹을 제기한 조선일보, '기획 분신' 의혹을 확산한 원희룡 전 국토부 장관 등을 개인정보보호법 위반과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측은 악의적인 허위 조작 정보로 고통받는 시민들의 목소리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징벌적 배상제가 단순히 언론을 통제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제도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
최근의 징벌적 손해배상제 논의가 단순히 법안 하나를 통과시키는 문제가 아님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는 성급한 입법 절차에 대한 문제, 언론의 자유를 위협하는 권력의 속성에 대한 경계, 허위 정보로 고통받는 시민들의 구제 방안, 그리고 언론 스스로의 자정 능력 회복이라는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강택 '언론정책개혁집단 세움' 연구위원이 대안으로 제시한 전략적 봉쇄소송(SLAPP) 방지법 도입 논의는 언론의 자유와 책임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균형 잡힌 해법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이번 논쟁은 정부와 언론 모두에게 중요한 과제를 남겼습니다.
정부는 투명하고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법안을 논의해야 하며, 언론은 스스로의 신뢰를 되찾기 위한 자율적인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진정한 ‘언론 개혁’의 발판이 되려면, 언론의 자유와 책임, 그리고 피해자 구제라는 세 가지 가치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균형 잡힌 해결책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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