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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가짜뉴스와 민주주의 위기 ③ 탈진실 시대···정보의 지배와 진실의 조건은?

심병철 기자 입력 2025-09-14 14:00:00 조회수 75

우리는 객관적 사실보다 개인의 신념과 감정이 여론을 지배하는 '탈진실(post-truth)'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2016년 옥스퍼드 영어 사전이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이 개념은 단순한 유행어가 아닙니다.

같은 해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페이크 뉴스'라는 용어를 정치적 무기로 사용하면서, 가짜 뉴스는 전 세계적 현상으로 확산했습니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정보의 지배'에서 현대 사회가 '정보 체제(Information Regime)'로 전환되었다고 진단합니다.

그는 생활세계의 디지털화가 거침없이 진행되면서 우리의 지각, 우리가 세계와 맺는 관계, 우리의 공동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정보의 쓰나미가 파괴적인 힘들을 발휘한다고 경고합니다.

스웨덴의 철학자 오사 빅포르스는 '진실의 조건'에서 진실이 인간의 믿음이나 선호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개념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처럼 우리 생각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진실이 있으며, 이를 부정하는 것은 지식과 합리적 논의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훼손한다고 경고합니다.

지난 5월 개최된 언론 정책 싱크 탱크인 '언론개혁정책집단 세움'의 토론회는 이러한 철학적 통찰과 현실적 위기의식이 만납니다.

본 기사는 한병철과 빅포르스의 철학적 분석을 바탕으로 '언론개혁집단 세움'의 논의를 심층적으로 재구성해, 탈진실 시대의 가짜 뉴스 현상을 분석하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해법을 모색합니다.



철학적 진단: 정보 체제와 진실의 위기

정보 체제와 인포크라시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현재의 지배 형태를 '인포크라시(Infocracy)'라고 명명합니다.

그는 현대 사회를 정보 체제로 규정합니다.

이는 정보와 알고리즘, 인공지능을 통한 정보 가공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과정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지배 형태입니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과거 규율 체제가 신체와 에너지를 착취했던 것과 달리, 정보와 데이터가 착취의 대상이 됩니다.

또한 민주주의가 정보의 지배로 변질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정보 체제의 특징은 지배가 은밀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소셜미디어의 친근함, 검색엔진의 편리함, 스마트 앱의 정중한 서비스 뒤에 숨어있습니다.

이는 정보 체제 내에서 민주주의를 대체하고 있는 새로운 지배 형태를 의미합니다.

한병철은 정보와 진실을 명확히 구분합니다.

정보의 특성은 시간적 안정성이 없고 지각을 파편화하며 방향 설정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가산적이고 누적적이며, 의미가 텅 비어 있습니다.

정보가 진실처럼 깊은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마치 숫자처럼 단순히 더해지고 쌓이는 특성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반면 진실은 서사적이고 독점적이며 방향성과 의미를 제공합니다.

'정보의 옳음 혹은 맞음 그 이상'인 것입니다.

한병철은 "정보는 시간적 안정성이 없다. 왜냐하면 정보는 '놀라운 일이 주는 흥분'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적 불안정성 때문에 정보는 지각을 파편화한다"고 분석합니다.

이러한 정보의 특성은 사실성의 존재 자체를 의문시하는 음모론과 가짜 뉴스가 확산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한병철은 현대 사회가 기존의 '판옵티콘(감시 사회)'을 넘어선 새로운 형태의 통제 사회로 진화했다고 봅니다.

이는 물리적 감시나 강압이 아닌, '데이터'와 '정보'를 통해 사람들의 행동을 예측하고 조종하는 방식입니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개인 정보를 제공하고, 이를 바탕으로 '알고리즘'이 우리의 선택을 유도합니다.

디지털 사회는 모든 것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지만, 한병철은 이것이 오히려 통제의 수단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과도한 투명성은 우리의 내면과 사유를 빈곤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좋아요'나 '공유' 같은 외부의 반응을 갈구하게 만듭니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진실'은 상대화되거나 붕괴합니다.

사람들은 '팩트'보다는 '이야기(서사)'나 '감정'에 더 쉽게 동화되고, 이는 포퓰리즘이나 가짜 뉴스 같은 현상을 심화시킵니다.

정치는 진실을 탐구하기보다 더 많은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데 집중하게 됩니다.

정보는 너무 빠르게 순환하고, 사람들은 깊이 있는 사유나 성찰을 할 시간을 갖지 못합니다.

정보의 파편화와 빠른 소비는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닌, '정보'를 끊임없이 수집하고 소비하는 행위로 대체됩니다.

이는 결국 비판적인 시각을 잃게 만듭니다.

한병철은 인포크라시가 '정보'를 통해 사람들의 자유 의지를 은밀하게 잠식하는 새로운 형태의 권력이며,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사유의 주체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객관적 진실은 필요하다
스웨덴의 철학자 빅포르스는 감정이나 신념이 객관적인 사실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탈진실 시대가 도래했음을 지적합니다.

이 시대에는 단순히 거짓말을 하는 것을 넘어,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능력 자체를 빼앗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집니다.

그는 지식이 성립하기 위해 다음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1. 믿음(Belief): 어떤 주장을 사실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2. 진실성(Truth): 그 주장이 실제로 진실이어야 합니다.

3. 정당화(Justification): 그 믿음을 지지하는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빅포르스는 사람들이 진실을 거부하고 왜곡된 지식을 고수하는 현상, 즉 '지식 저항'의 원인을 심리학적, 사회학적 관점에서 분석합니다.

확증 편향, 집단적 소속감, 음모론 등이 지식 저항을 부추기는 주요 요인이라고 설명합니다.

오사 빅포르스는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지식에 대한 책임감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개인의 비판적 사고 능력을 키우고, 언론과 교육 기관이 진실을 전달하는 본연의 역할을 회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트럼프의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 주장을 전체주의 국가의 선전에나 어울릴 법한 교묘한 전략이라고 비판합니다.

빅포르스는 진실과 거짓의 관계를 기묘하게 뒤틀어 놓는 이러한 시도가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한다고 경고합니다.

빅포르스에 따르면 진실은 인간의 믿음이나 선호와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따라서 객관적 진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지식과 합리적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빅포르스는 진실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철학·심리학·사회학·언어학 등 모든 인문학적 지식을 동원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가짜 뉴스의 본질: 허위 조작 정보의 세 가지 얼굴
박권일 사회 비평가는 '세움' 토론회에서 가짜 뉴스를 '허위 조작 정보(disinformation)'로 개념화하며, 이를 세 가지 형식으로 분류했습니다.

기만(Deception): 의도적 진실 은폐
기만은 진실을 인지하고도 이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정보를 조작하는 행위입니다.

박권일은 "트럼프의 '대안적 사실'이 미국 정치를 지배한 것처럼, 한국에서도 진실이 아닌 감정이 여론을 움직이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한병철의 분석에 따르면, 정보 체제에서는 "모든 사람이 능동적 송신자"가 되어 "항상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하며, 이 과정에서 의도적 기만이 더욱 쉽게 확산합니다.

음모론(Conspiracy Theory): 서사 과잉의 산물
음모론은 복잡한 사건을 강력한 음모자들의 비밀 음모로 설명하는 담론입니다.

박권일은 "'중국인이 한국 선거에 개입했다'는 음모론이 유튜브를 비롯한 사회적 관계망 서비스·보수 정치인의 입을 통해 빠르게 퍼진 것이 대표적인 '탈진실 담론'"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한병철은 정보 체제에서 "담론과 타당성 주장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적 과정이 사라진 자리에는 기계적 계산을 통한 관리가 남는다"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공백 속에서 음모론은 명쾌한 서사를 제공하며 대중의 지지를 얻습니다.

헛소리(Bullshit): 진실 자체의 무력화
'참, 거짓과 무관하게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을 뜻하는 헛소리는 진실을 최소한 의식하는 거짓말보다 더 해악적입니다.

박권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실 자체를 무관심하게 만드는 가짜 뉴스를 악용한 윤석열 정권은 권위주의 시절의 반공 프레임과 디지털 플랫폼의 음모론을 융합시켰다"고 말합니다.

그는 "'날리면'·'부정선거'·'중국 개입' 등 검증 불가능한 주제로 여론을 장악하려고 시도했다"고 분석했습니다.


탈진실 현상의 구조적 배경
박권일은 허위 조작 정보 문제가 심화한 배경으로 세 가지 요인을 제시했습니다.

서사 과잉(Narrative Excess)
음모론은 '이야기'의 매력에서 힘을 얻으며, 진리성보다는 '그럴듯함'에 좌우됩니다.

사람들은 고통이나 불행의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서사를 만들어 괴리를 봉합하려 합니다.

특히 극우파는 특정 집단을 가해자로 지목하며 명쾌한 답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럴듯한 이야기'가 곧 진리는 아니며, 진리는 대체로 비연속적이고 권태롭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무관심합니다.

한병철은 "중독적이고 강박적인 형태마저 띤 소통 도취가 사람들을 새로운 미성숙 상태에 가둔다"고 분석합니다.

사람들은 복잡한 진실보다 '그럴듯한 이야기'에 매료되며, 스마트폰과 디지털 미디어의 끊임없는 정보 공급으로 인해 '세 줄 요약'처럼 간결한 정보에만 반응하게 됩니다.

정치적 부족주의(Political Tribalism)
거대 양당이 의회를 독점하고 지지자들이 서로를 선악 이분법으로 규정하면서, '우리 편'은 선과 진실, '상대 편'은 악과 거짓의 상징이 됩니다.

이는 합리적 판단을 무력화시키고, 상대방의 허물을 자기 정당성의 근거로 삼아 끝없이 대결하게 만듭니다.

박권일은 "종족주의와 정체성 정치를 강화하는 음모론"을 확산시킨다고 지적합니다.

특정 정파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으로 인해 합리적 판단이 무력화되며, 진실 여부보다 '우리 편'에 유리한지를 먼저 판단하게 됩니다.

인지 고갈(Cognitive Exhaustion)
박권일에 따르면 과도한 정보 유입으로 인해 이를 적절히 처리할 인지 역량을 확보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주목 경쟁' 시대에는 사람들의 관심을 오래 붙잡아두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스마트폰의 존재만으로도 인지 능력이 감소하는 '두뇌 유출' 현상이 발생합니다.

또한, '세 줄 요약'으로 대표되는 간결함 추구는 복잡한 주제를 깊이 다루기 어렵게 만들어 미디어를 앙상하고 얄팍하게 만듭니다.

한국형 가짜 뉴스의 특징
김춘효 세움 연구위원은 스카이데일리, 조선일보, 한겨레신문, KBS, MBC, SBS, 고성국TV, 성창경TV, 신의 한수 등 9개 매체의 보도 담론을 분석했습니다.

그는 "한국형 가짜 뉴스는 서구의 극우 보도 담론과 유사한 특징을 가지지만 레거시 미디어와 극우 매체들 간의 담론 공명 현상은 발견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김 연구위원은 "극우 매체와 유튜브 채널을 통해 확산하는 극우 보도 담론은 '종북 좌파 이데올로기 공격'과 '87 민주 공화정 체제 부정'을 위해 중국인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는 "극우 매체들이 중국인을 '경제적 이익의 대상'이자 동시에 '안보 위협자'라는 이중 구도를 기반으로 반공주의와 극우적 민족주의를 결합한 혐중 담론을 유포했다"는 분석으로 이어집니다.


종합적 해법: 철학적 통찰과 현실적 대안

1. 미디어 문해력 교육의 확장
이강택 언론개혁집단 세움 준비위원장은 가짜 뉴스를 규제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해결책으로, 시민들이 허위 정보를 스스로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교육을 강조합니다.

그는 단순한 '팩트체크'를 넘어, 정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덧붙입니다.

이를 위해 공영방송이나 언론 재단이 주도적으로 교육 콘텐츠를 개발하고, 학교 정규 교육 과정에 포함시키는 등 범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유튜브와 같은 새로운 플랫폼의 특성을 고려한 비평과 교육을 통해 시민들이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강택 준비위원장이 제시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한병철이 강조한 '경청 능력'의 회복과 맞닿아 있습니다.

한병철은 "희미해져 가는 '진실을 향한 충동·의지·용기'와 '경청 능력'이 민주주의와 맺는 관계"를 분석하며 그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2. 법적·제도적 규제의 실효성 제고
언론개혁집단 세움은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외에 가짜 뉴스 대응 방안으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을 포함한 세 가지 해법을 더 제시합니다.

ㄱ. 혐오 표현에 대한 강력한 규제
가짜 뉴스가 혐오 표현과 깊이 결탁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가짜 뉴스 자체보다는 그 토대가 되는 혐오 표현을 강력하게 규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통해 특정 인종, 성별, 지역 등에 대한 무분별한 혐오 표현을 법적으로 제재하고, 온라인 플랫폼이 자정 능력을 갖추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이는 가짜 뉴스가 싹트기 전에 사회적 대화의 질을 높여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자는 접근법입니다.

ㄴ. '언론사 탈을 쓴 공작 기지'의 차단
세움은 일부 매체가 언론사의 외피를 쓰고 의도적으로 허위 정보를 유포하는 것에 대해 강력한 제재가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이러한 매체들은 진실을 추구하는 언론의 역할을 하지 않고, 혐오와 조작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사업 모델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명예훼손죄 처벌을 강화하고, 이들이 허위 정보 유포를 통해 부당하게 이익을 얻는 것을 막기 위해 광고 게재를 금지하는 등 재정적 압박을 가해야 합니다.

ㄷ.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조건부 도입
이강택 준비위원장은 "가짜 뉴스에 대한 섣부른 대응은 표현의 자유를 위축하고 정치적 악용이 우려된다"면서도 "지난 탄핵 국면에서 보았듯이 온라인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 가짜 뉴스는 엄청난 사회적 폐해를 낳는다"고 밝혔습니다.

가짜 뉴스를 생산, 유포하는 행위에 대해 강력한 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제도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도입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특히 미국 법원이 폭스 뉴스와 도미니언 간의 소송에서 폭스 뉴스의 '실제적 악의(actual malice)'를 인정해 막대한 배상금을 합의한 사례를 언급했습니다.

이 제도가 언론의 실수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허위 정보를 유포한' 악의적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 데 효과적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준비위원장은 "조건부로 도입한다면, 앞서 언급된 '표현의 자유 위축' 딜레마를 최소화하면서도 가짜 뉴스를 생산하는 행위에 대해 강력한 경종을 울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3. 민간 차원의 자율 시스템 구축
민간 차원의 자율 시스템 구축도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토론회에 참석한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박선아 교수는 독일의 '코렉티브(Correctiv)'와 같은 역할이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코렉티브가 정부로부터 독립된 민간 기구로서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며 팩트 체크, 탐사보도, 시민 교육을 수행하는 성공적인 사례라고 언급했습니다.

또한, 그는 가짜 뉴스에 대한 대응이 '처벌의 문제'가 아닌 '정보 생태계의 구조 혁신 과제'라고 규정했습니다.

이를 위해 정부 중심의 규제에서 벗어나 시민 중심의 검증 시스템과 플랫폼의 책임을 결합한 통합 생태계 모델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박 교수가 제시한 독일의 '코렉티브(Correctiv)' 모델은 한병철이 강조한 "소통적 합리성의 회복'과 연결됩니다.

한병철은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이성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지금은 디지털 사회의 소통이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현대의 소통이 진정한 이해를 위한 합의가 아닌, 단순히 더 많은 정보를 주고받는 '정보적 합리성'으로 변질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코렉티브와 같은 모델은 이런 측면에서 소통적 합리성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정부로부터 독립된 중립적 기구를 통한 팩트체크와 시민 교육은 "산술적 합리성"에 맞서는 "소통적 합리성"의 구현인 것입니다.

4. 지적 겸손과 민주 공화정의 회복
박권일 사회 비평가는 "'탈진실' 현상은 계몽과 규제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며 "표현의 기회가 지나치게 많아지면서, 자신의 지식수준을 넘어선 발언이 활발해지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시민의 발언 기회 증가는 순기능도 있지만, 전문가의 숙고된 말과 소수자·약자의 고통의 언어가 평가 절하되고 시장의 강자와 열광적 다수의 목소리만 공론장을 점령하는 역기능을 낳았다"고 분석했습니다.

박권일은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서 '공화주의(republicanism)'는 정치적 권리의 평등을 보장하지만 '모든 의견의 평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다수결주의가 아닌, 힘없고 소수인 사람들을 보호하고 실질적 평등을 위해 불공정을 허용하는 정신을 내포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박 비평가는 "'탈진실' 시대의 가장 무서운 결과는 우리가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와 타인의 고통에 제대로 감응하지 못하는 '마비'와 '무감각'"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는 "과잉 접속과 과소 접촉이 일상이 되면서 타자와의 교감 능력이 희미해지고, 온라인에서의 발언 부담 감소는 책임감과 윤리의식의 약화로 이어진다"고 분석합니다.

한병철 역시 "정말로 자유로운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정보들이다. 정보사회의 역설은 사람들이 정보 안에 갇힌다는 것이다"라고 경고합니다.

정보의 감옥에서 진실의 자유로
박권일은 "민주 공화정은 구성원에게 '지적 겸손(intellectual humility)'을 요구한다"며 "고통을 호도하고 전가하는 정치가 아니라 실제로 고통을 줄이는 정치가 필요하며, 이를 통해 '탈진실'의 함정에서 벗어나 실질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한병철은 "정치는 데이터 주도의 시스템 관리로 대체된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결정들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통해 내려진다"고 경고했습니다.

또한 그는 "정보에는 '방향 설정력'이 없다"며 "소통적 합리성이 아니라 산술적 합리성을 지닌 인공지능으로 진실을 찾을 수는 없다"고 강조합니다.

빅포르스가 11만 스웨덴 고교생에게 배포한 탈진실 시대의 가이드북이 된 '진실의 조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진실은 여전히 존재하며, 우리는 그것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짜 뉴스와의 싸움은 단순한 정보 오염을 넘어 한병철이 경고한 '정보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싸움입니다.

우리는 빅포르스가 제시한 객관적 진실의 조건을 인정하고, 한병철이 강조한 진실을 향한 충동을 회복하며, 박권일이 제시한 지적 겸손을 실천해야 합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길이지만, 진실을 탐구하고 수호하는 여정이야말로 합리적 사회와 건강한 민주주의를 재건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정보의 쓰나미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한병철이 말한 '경청 능력'과 빅포르스가 옹호한 '객관적 진실에 대한 겸손', 그리고 박권일이 강조한 '지적 겸손'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탈진실 시대를 넘어 진실의 시대로 나아가는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 # 가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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