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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입양인의 가족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라는데···대구 출신 덴마크 입양인, 50여 년 만에 가족과 극적 상봉

동대구역에서 가족과 극적 상봉한 덴마크 입양인
1967년 한국에서 태어나 1972년 덴마크로 입양된 제릭 박 비스가드 씨가 지난 5월 말 대구를 다녀간 지 두 달여 만인 8월 10일 다시 대구를 찾았습니다.

50여 년 전 헤어진 누나와 형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7월 한국 경찰로부터 가족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고, 8월에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동대구역에 마중을 나온 형과 누나 그리고 여동생은 한 번에 비스가드 씨를 알아봤습니다.

"오빠!", "상교야!" 라고 부르며 서로를 얼싸안고 왈칵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7살 터울의 형 박의교 씨와 동생 비스가드 씨는 너무나 닮은 모습이었습니다.

박의교 씨는 "닮았죠? 나도 첫눈에 보는 순간 똑같다고 생각해요. 젊었을 때 얘하고 나하고 사진을 비교해 보면 거의 같아요."라며 눈물을 훔쳤습니다.

보육원에 맡긴 뒤 며칠 만에 데리러 갔지만···
비스가드 씨의 정확한 한국명도 밝혀졌습니다.

입양 기록지에는 '박상조'로 나와 있었지만, 부모가 지어준 진짜 이름은 '박상교'였습니다.

형과 누나, 여동생은 살아오면서 한 번도 비스가드 씨를 잊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동생이 어디에 살아는 있을까?", "오빠는 잘 지내고 있을까?" 눈시울을 붉히며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지난 1997년 돌아가신 아버지도 생전에 술기운을 빌려 찾지 못한 자식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했다고 전했습니다.

형 박의교 씨는 "(아버지가) 가슴 속에 품고 계셨던 것 같아요. 한 번씩 술 한 잔 드시고 나면 혼자 하소연처럼 하시는데, 그걸 우리한테 일일이 다 표현을 못 하시죠."라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볼 수 있었는데, (1988년) 얘가 한국에 왔을 때 아버지가 살아 계셨거든요."라며 아쉬워했습니다.

형과 누나에 따르면 비스가드 씨는 생후 8개월 때 대구의 한 아동 보호 시설에 보내졌습니다.

친모가 비스가드 씨를 낳고 얼마지 않아 세상을 떠나, 아버지가 잠시 맡길 곳을 찾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생겨 친부가 비스가드 씨를 집에 데리고 가기 위해 보호 시설에 찾아갔지만, 다른 곳으로 보내진 뒤여서 찾지 못했다고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비스가드 씨는 5살 때까지 대구의 보호 시설에서 자랐고, 서울 위탁 시설을 잠시 거쳐 덴마크로 입양됐습니다.

비스가드 씨는 "어린 시절 고향의 향기(냄새)가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번데기'를 기억해요. 항상 거의 매일 배가 고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동생이 '맥콜'이 마시고 싶대요."
50여 년 만의 극적 상봉 후 온 가족이 누나 집에 모였습니다.

비스가드 씨의 누나는 "동생이 1988년 서울에 왔을 때 마셨던 '맥콜'이 마시고 싶대요."라며 동네 마트로 달려갔습니다.

비스가드 씨는 덴마크에서 사 온 초콜릿을 꺼내 누나에게 건넸습니다.

누나는 동생을 위해 수박과 복숭아, 키위를 잘라 내어 오며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네. 한 번 먹어봐"라며 권했습니다.

마치 명절이라도 된 듯 형제, 자매 그리고 조카들까지 모두 모여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입양인의 가족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
비스가드 씨가 가족을 만나게 된 것은 입양 기관의 한 직원이 지난 4월 그에게 이메일을 보내 사망한 친부의 이름과 주소를 알려주면서 가능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드문 일입니다.

비스가드 씨는 지난 5월 '대구시 남구'라는 주소만을 들고 대구 남구청을 찾았습니다.

사망한 친부의 가족관계증명서만 떼면 다른 가족의 인적 사항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개인정보 보호법에 가로막혀 정보를 알지 못하고 덴마크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다만 당시 한국 경찰에 헤어진 가족 찾기 신청을 했고, 구청 직원과 경찰의 선의에 의해 가족에게 연락이 닿을 수 있었던 겁니다.

6·25전쟁 이후 해외 입양인은 22만 명으로 추산되며, 지금도 수많은 입양인이 가족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입양 과정에서 남겨진 정보가 너무 부족하고, 입양 기관이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어 가족을 만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여기에 현행법상 친부모의 정보만 전달해 줄 수가 있어 비스가드 씨의 경우처럼 친부모가 사망했을 때는 도움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해외 입양이 급증할 때는 1960~70년대로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고인이 되는 부모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현행법으로는 사망한 부모의 정보로는 가족을 찾을 수가 없어 혈육 찾기 범위를 형제·자매로도 넓혀달라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권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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