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서상국의 시인의 저녁

김규종 서상국의 시인의 저녁

18시 15분

누구나인문학

6월 2일 책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


<모던뽀이, 京城을 거닐다>,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는 만화가의 비판적 시선


<모던뽀이, 京城을 거닐다>, 만문만화로 보는 근대의 얼굴, 신명직 지음, 현실문화연구, 2003.


다채로운 경력의 저자 신명직의 근간 <모던뽀이, 京城을 거닐다>의 부제는 이 책에서 담고자 하는 거의 모든 것을 드러낸다 - 만문만화로 보는 근대의 얼굴. 따라서 우리에게 매우 낯선 용어인 만문만화를 이해할 수 있다면 문제의 상당 부분이 해소될 수 있겠다.

"만문만화는 1920-30년대에 주로 신문과 잡지 등의 지면에 발표되었는데, 한 컷 짜리 만화에 짧은 줄글이 결합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여느 만화에 말풍선이 있는 것과는 달리 만문만화는 서술문으로 의미를 전달한다. 말풍선의 유무가 일반만화와 만문만화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책머리에, 6-7쪽)

물론 예외도 있다. <그림 65-67) 양화공과 그 청공靑空 (상중하) 『인생 스켓취』 第4景>을 (120-125쪽) 본보기로 들 수 있다. 동경유학을 마친 구두 수선공 영섭과 돈 때문에 늙은이의 첩실로 삶을 꾸려나가는 아리따운 여자 사이의 하룻밤 사랑을 안타까운 필치로 그려낸 이 작품은 짧지 않은 길이의 서정적인 창작산문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완전히 사라져 명맥조차 없는 만화형식인 만문만화를 통하여 1920년대 말 30년대 초반의 식민지 조선, 그중에서도 경성의 다채로운 풍경을 담아내고자 하였던 만화가 석영 안석주의 작품을 오늘의 관점에서 재조명하고자 하는 것이 이 저작의 근본적인 목표다.

'카프'(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의 중앙위원을 지내다 '신간회'에서 활동하였고, 일제 말에는 친일행각을 일삼았던 안석주는 해방공간에서 좌우익의 대립을 온몸으로 겪다가 세상을 버린 인물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이력과 변절은 근대적 시-공간인 식민지 조선을 살다간 인텔리겐차들의 비극적인 전형들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부록>, 327-333쪽 참조)

그런데 <모던뽀이, 京城을 거닐다>에서 안석주의 시선은 건강하고 단호하기 이를 데 없다. 식민지 조선의 간판 도시 경성이 드러내 보이는 여러 가지 얼굴 모습을 비판적인 관점으로 조명하는 석영의 화필과 문장은 상당히 견고하다. 그것은 시대와 불협화 하면서 좌익운동과 민족주의에 심취해 있던 시간대의 만화가에게 유지되었던 건강한 이데올로기적 토양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만화가의 흉중과 눈길을 자극한 당대의 거의 모든 사회-문화적인 현상이 안석주의 만문만화에는 넘쳐흐른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70여 년 전의 경성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온갖 염량세태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유희와 자살공간 한강 인도교, 새로운 의상과 노출, 영화, 유성기와 댄스, 양키문화, 결혼과 가족관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 박람회와 백화점 등등 석영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당대적인 인간과 사회현상은 거의 없었다.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모던뽀이'와 그의 상대역 '모던껄'은 특히 우리의 흥미를 자극한다. 근대적인 교육기관을 마친 인텔리들의 곤궁한 삶과 거기서 발원하는 룸펜의 생활을 적시하는 만문만화는 독자의 폐부를 찌른다. 그림 63)에 나오는 지식인 실업자 '나'는 부랑자 수준으로 전락해 있으며, 그림 47)의 등장인물 '양복장이 룸펜'은 그 시대를 살았던 인텔리들의 신산했던 일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경기구를 타고 하늘로 오르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다. "학교를 마친 다음, 돈을 모아 별장을 짓고, 첩을 얻고, 요정을 전전하는" (89쪽) 꿈을 꾸지만, 그들이 맞닥뜨리는 현실은 차갑고도 건조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병실을 전전하거나 (그림 34), 택시 운전사로 취직하여 호구지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림 39, 99)

어려운 현실을 살면서도 모던보이들은 시대의 첨단유행을 맹렬하게 추종한다. "경성 거리에 어떤 모던보이가 거미발 같은 손으로 금칠한 책을 움켜쥐고, 풀대님한 바지에 레인코트를 입고, 사쿠라 몽둥이를 들고서 연애시를 외우며 비척거리며 걸어간다." (132쪽) 이들은 영화와 축음기가 대표하는 당대의 유행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그런데 만화가 안석주의 눈길을 강렬하게 잡아끈 존재는 누구보다도 모던걸이었다. 근대로의 이행기를 자주적인 역량으로 경험하지 못한 식민지 조선의 신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단한 삶의 양태가 자연스레 그의 관심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교육받고 주체적으로 사유하는 근대적인 여학생들의 형상과 기생적인 존재로 등장하는 모던걸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석영은 가감 없이 그려낸다. (그림 42, 44, 62)

모던걸에 대하여 안석주는 매우 비판적인 자세를 취한다. 곤궁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옷치장에 여념이 없으며, 유행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백색피부를 열망하는 텅 빈 머리의 소유자들로 그려지는 모던걸의 기생성을 만화가는 정면으로 공격한다.

"요사이 조선에는 늘어가는 은근자와 같이 그 기원도 모를 새 직업부인이 생겼고... '스틱껄'이라는 것은 사나이의 다리를 대신하는 것이고, '핸드껄'이라는 것은 사나이의 손을 대신하는 것이다... 두 가지는 다 각기 그 거리가 다르다 하겠으나, 사나이의 겨드랑이 밑에서 살아가기는 매한가지다." (107쪽)

이런 모던걸과 모던보이들이 유성기의 음악에 맞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댄스, 블루스, 재즈와 같은 서양 춤에 정신을 빼앗기고 (157쪽), 어린아이들까지 유행가 <낙화유수>를 따라 부르는 풍속도에 대한 신랄한 칼날이 (274쪽) 안석주의 만문만화에서 그 빛을 발한다.

<모던뽀이, 京城을 거닐다>를 접하면 누구라도 그 시대와 공간을 이내 떠올릴 수 있으며, 따라서 여기 실린 만문만화들은 매우 소중한 시대의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저자가 기울인 공은 대단한 것으로 생각된다. <저자후기>에 드러나 있듯이, 마이크로필름에서 만문만화 대부분을 일일이 찾아내 복사하는 작업을 거쳐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되리라 믿는다.

몇 가지 흠을 지적하고자 한다. 만문만화에 실린 만화가의 고어체를 지나치게 고집하여 우리 시대 독자들의 이해를 고려하지 않은 점, 동일한 만화를 두 군데 이상 인용-해설함으로써 야기되는 반복의 지루함을 선사한 점, 저자가 문화 과학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적지 않은 원고 분량임에도 참고문헌 목록을 책의 말미에 싣지 않음으로써 학문적인 가치와 효용을 스스로 떨어뜨린 점, 원문과 배치되는 표기상의 오류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렇지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의 작사자 석영 안석주의 만화작업을 오늘에 되살려 20세기 초반 식민지 경성의 풍경화를 선명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현대독자의 역사의식 고취에 기여하고 있음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고대사를 포함한 잃어버린 우리의 과거사 연구의 지평은 어떤 경우에라도 마땅히 복원-확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