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서상국의 시인의 저녁

김규종 서상국의 시인의 저녁

18시 15분

누구나인문학

11월 23일 영화 <1984>

진지하고 건조하며 화장기 없는 영화 <1984> 고등학교 다닐 때 끼고 살았던 송성문의 <정통종합영어>는 불세출의 명저로 꼽혔다. 홍성대가 출간한 <수학의 정석>과 함께 대입 수험생들의 고전 중의 고전이 <정통종합영어>였다. 영어 깨나 한다는 축들은 거기에 김열함이 쓴 <영어의 왕도>를 추가로 공부했다. 마치 수학 잘하는 학생들이 <절대수학>을 연마한 것과 같은 이치다. <정통종합영어>에 나오는 지문 가운데 하나를 지금도 기억한다. 가파른 산비탈을 달리던 마차가 낭떠러지에서 추락할 위험에 빠진다. 프랑스인들은 공포에 질려 마차 안에서 소리 지르고 이리저리 몸을 던지며 공포에 질린다. 반면에 영국인들은 침묵한 채 자리를 지킨다. 위험을 벗어난 마차가 여인숙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인들은 추락의 공포를 망각한 상태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그제야 불안과 공포로 몸을 떨면서 자리에 눕는다. 영국과 프랑스 국민들의 차이점을 극단적으로 축약하여 보여주는 지문이다. 맞든 틀리든 그것은 소싯적의 내게 지울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조지 오웰의 장편소설 <1984>를 원작으로 한 영화 <1984>는 영국인들처럼 진지하고 건조하다. 원작을 복사하다시피 제작한 영화는 관객의 상당한 지적 수준과 고도의 인내력을 필요로 한다. 반 유토피아 소설 <1984> 1516년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쓴다. 당대 유럽각국의 영토 확장 야욕과 그로 인해 고통받는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상에 없는 이상향’을 그려내 보인 작품이다. 만민이 평등하고 화폐가 없으며 사유재산이 없는 유토피아. 결혼하려는 남녀가 상대의 나신(裸身)을 보고 나서 결혼 여부를 결정하는 유토피아. 1917년 10월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하여 볼셰비키 권력이 수립된 러시아에서 반 유토피아 소설이 최초로 등장한다. 예브게니 자먀틴의 <우리들>(1924)이다. 인간이 이름을 상실하고 알파비트와 숫자로 자신을 나타내는 미래의 단일제국을 형상화한 장편소설 <우리들>. 시간 율법표에 따라 자동화된 기계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인간군상. ‘은혜로운 분’의 지배를 당연시하고 자유 대신 행복(빵)을 선택한 사람들의 세계. 1932년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를 출간한다. <우리들>에 등장하는 테일러 시스템을 발전시킨 ‘포드 시스템’에 따라 작동하는 세계국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소마’라는 알약으로 인간들의 영혼을 종교처럼 지배하는 제국.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우연히 제국으로 오게 된 청년 존이 자유와 자유의지를 갈파하다 자살할 수밖에 없는 완전 통제사회. 그 뒤를 이어 조지 오웰은 1949년 장편소설 <1984>를 출간한다. 소설출간과 불과 35년을 시간 배경으로 삼은 <1984>. 오웰은 사회주의 소련과 독재자 스탈린을 전면에 내세운다. 빅브라더로 표상되는 스탈린과 골드스타인으로 투영된 트로츠키, 세계를 3분하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의 각축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자유와 자유의지를 갈파하는 오웰.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남자 윈스턴 스미스 주인공 윈스턴은 ‘진리부’에서 과거를 왜곡하여 당의 무오류를 일상화하는 작업에 종사하는 일반당원이다. 그가 거주하는 나라 오세아니아는 3억 인구 가운데 2% 600만의 핵심당원과 13% 3,900만의 일반당원, 나머지 85% 2억 5,500만의 ‘프롤(레타리아트)’로 구성돼 있다. 일반당원인 윈스턴은 텔레스크린과 사상경찰, 헬기 등으로 24시간 감시당한다. 언젠가 프롤 구역에 있는 해링턴의 가게에서 고급한 공책을 구입한 윈스턴은 국가가 금지한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곳에 그는 대문자로 “타도 빅브라더”라고 쓴다.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 빅브라더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를 가진 윈스턴은 핵심당원 오브라이언에게 호감과 동류의식을 느낀다. 윈스턴은 그와 대면하고 반역단체 ‘형제단’에 가입한다. 윈스턴의 사유는 2 더하기 2는 4라는 공식으로 구체화한다. 그것이 자유의지이며,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자연히 따라올 것이고 믿는다. 하지만 당과 빅브라더를 대신하는 인물 오브라이언은 2 더하기 2는 4가 아니라, 당이 원하는 대로 3이나 4 혹은 5가 될 수 있음을 고문을 통해 주입한다. 고문과 공포로 윈스턴을 세뇌하는 오브라이언. 인간의 자유와 자유의지를 신봉하는 윈스턴은 당과 국가를 파괴하려는 열망에서 순결과 선을 증오하며 타락을 원한다. 아이들이 부모를 감시하는 나라, 사랑이 아니라 증오와 공포로 건설되고 유지되는 나라, 동아시아나 유라시아와 동맹을 맺고 끝없이 전쟁에 몰두하는 나라, 거짓과 진실의 경계가 무너진 나라를 전복하고 싶어 하는 윈스턴. 육체적인 쾌락을 좇는 여인 줄리아 여주인공 줄리아는 지금과 여기에 함몰되어 있으며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26세 여성이다. 그녀는 윈스턴에게 일반당원들과 수백 번 섹스 했으며, 뼛속까지 타락했다고 말한다. 줄리아와 윈스턴은 서로의 육체에 탐닉한다. 그들은 다가올 파멸을 예견하면서도 그럴수록 상대의 몸과 섹스를 강렬하게 추구한다. 그들의 벌거벗은 몸은 그것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들이 처음으로 관계를 맺는 런던교외의 풍광은 평안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초록의 풀이 언덕을 빼곡하게 덮고 있으며, 꼭대기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오랜 벗들처럼 다정하게 서있다. 5월의 훈풍과 훈향(薰香)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몸을 확인한다. 영화는 그곳으로 더러는 윈스턴을 더러는 오브라이언과 윈스턴을 데리고 간다. 생명과 평화를 상징하는 초록의 산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른 것은 윈스턴의 애틋한 경험이 환영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사상적 동지처럼 보이는 오브라이언이 제공해줄 것 같은 세계의 지평이 초록의 공간으로 현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환희와 희열, 열락의 공간이 사상경찰이자 고문 기술자이며 세뇌 전문가와 함께하는 공간으로 전화(轉化)한다. 어느 날 줄리아가 그들의 밀회장소인 해링턴의 이층으로 진짜 귀한 물건들을 가져온다. 내부당원용으로만 제공되는 설탕과 커피, 홍차와 우유, 흰 빵과 잼을 가져온다. 만성적인 물자부족에 시달리면서도 최상층 지배집단의 특권을 용인한 타락한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민낯을 고발하는 장면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거기서 줄리아는 진정 사랑스러운 여인이 된다. 오브라이언과 윈스턴의 대결 7년 전부터 윈스턴을 감시해온 오브라이언은 악명 높은 고문실 101호에서 가혹한 고문과 심문으로 윈스턴의 영혼을 유린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는 당의 공식을 충실하게 집행하는 그는 현재와 과거, 미래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브라이언에 따르면, 진실한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에 따라 과거는 조정되거나 수정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현재의 권력과 통치를 위해서라면 과거사실과 숫자를 날조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윈스턴은 그런 오브라이언과 당의 사고에 저항하다가 체포된 것이다. 과거가 날조된다면 진실한 현재와 미래는 없다고 윈스턴은 생각한다. 권력에 대한 오브라이언의 사유는 끔찍하다. 윈스턴에게 그는 말한다. “권력은 인간에게 고통과 굴욕을 주는 거야. 권력은 인간정신을 조작하여 원하는 모델로 재조립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권력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인 셈이지.” 윈스턴처럼 자유의지를 주장하고 권력에 저항하는 자를 세뇌시켜 당에 대한 충성과 빅브라더를 향한 사랑만 남기는 것이 오브라이언의 과업이다. 인간성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는 윈스턴의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고문으로 스스로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육체와 영혼이 피폐해진 인간 윈스턴은 결국 굴복하고 만다. 어둡고 또 어두운 영화 <1984> 신어전문가 사임이 증발한 것처럼, 딸의 고발로 투옥되어 실종된 파슨스처럼 윈스턴 역시 아무 흔적 없이 사라질 운명과 대면한다. 오브라이언이 그에게 말한다. “거울을 봐. 마지막 인간의 추악한 몰골을 보라고. 너는 존재하지 않아. 넌 역사의 바깥에 있는 거야.” 완전한 세뇌 끝에 석방된 윈스턴을 구원하는 유일한 수단은 술이다. 술로 영혼과 육신을 지탱해야 하는 알코올 중독자 윈스턴. 어느 날 줄리아가 카페로 윈스턴을 찾아온다. 언젠가 그들은 자백은 배신이 아니며, 누구도 마음을 지배할 수 없다는 대화로 서로를 위로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들은 고문으로 전연 다른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쥐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윈스턴이 쥐 고문으로 줄리아를 배신한 것처럼 줄리아도 윈스턴을 배신한 것이다. 그들에게 남겨진 마음의 부채는 없다. 깨끗하게 청산되었기에 그들은 훌훌 털고 작별할 수 있다. 국가가 건네준 이별의 선물이었을까. 어떤 출구도 희망도 봉쇄된 <1984>의 세계는 일당독재와 개인 우상화가 지배하는 국가, 개인의 자유와 자유의지가 말살된 사회가 대면할 처절의 극한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오, 자유여, 사랑이여, 유토피아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