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서상국의 시인의 저녁

김규종 서상국의 시인의 저녁

18시 15분

누구나인문학

10월 12일 영화 <남한산성>

<남한산성>에서 돌이킬 것들


두 번째로 <남한산성>을 보러간 2017년 11월 초하루. 조조(早朝)할인과 아침나절의 고요함이 나를 반긴다. 소싯적에 ‘왜 조조(曹操)만 할인해주나’ 하는 의문을 가졌던 꿈같던 시절은 시위 떠난 화살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유비나 관우를 더 사랑했던 철없던 어린아이가 장성하여 이제 귀밑머리 희끗거리는 초로(初老)의 사내가 된 것이다. 9시 10분 상영시각에 맞춰 홀로 자리를 잡는다. 영화관 맨 뒷자리 에프(F)열 9번이다. 매표구가 한산해서 그런 거겠지, 혼잣말하며 화면을 바라본다. 길고 지루한 광고시간이 지나고 영화가 시작을 알린다. 들고나는 사람은 상기도 없다. 아, 정말 이대로 혼자일까, 하는 잠시잠깐의 생각. 고개를 흔들지만 설마, 하는 생각이 더 크게 가슴을 울린다. 번다함과 작별한 자의 넉넉한 고즈넉함이 외려 허전함과 비어있음을 동반할 줄은 차마 상상하지 못한 영역. 사위(四圍)가 캄캄해지고 영화의 시공간 배경을 설명하는 자막이 떠올랐을 때야 비로소 나는 홀로임을 자각한다. 혼자 영화를 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야, 중간에 누군가 들어올지도 모를 일이지.’ 영화 중간에 관객이 들어오는 일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한국처럼 객석의 소란과 방종(放縱)에 관대한 나라가 어디 또 있으랴. 이렇게 너른 영화관을 홀로 지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는 생각이 찾아든다. 그렇게 두 시간 넘는 시간이 오롯 지나간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과 이순신의 절명(絶命)으로 7년 전란 (戰亂) 임진왜란이 막을 내린다. 전란이 끝난 9년 뒤 암군 (暗君) 선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요청에 ‘회답겸쇄환사’라는 이름의 조선통신사를 파견한다. 도쿠가와 막부에 예의를 갖추고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을 귀국시킨다는 명분으로 통신사를 파견한 것이다. 선조의 뒤를 이어 1608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다. 후궁인 공빈 김씨 소생의 명민한 광해는 국가재난인 임란에 남달리 슬기롭게 대처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광해는 왜란으로 파괴된 사고(史庫) 정비, <동의보감(東醫寶鑑)> 같은 의서간행, 대동법 시행, 군적 정비를 위해 호패법을 실시하는 등 무너져버린 나라의 기강을 확립하려 진력한다. 광해는 왕위 경쟁자이자 동복 (同腹) 형 임해군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 선조의 정비 (正妃) 인목왕후 소생 (所生) 영창대군과 그를 옹립하려는 김제남 일파를 제거하기에 이른다. 대외적으로 광해는 몰락해가는 명과 만주의 신흥세력 후금 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실행한다. 그러나 재조지은(再造之恩,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워 준 은공)과 재조자소(再造字小, 나라를 다시 세워주고 작은 것을 사랑해줌)를 주장한 서인 일파가 1623년 (광해군 15년) 능양군을 앞세워 인조반정을 일으킨다. 이로써 조선의 등거리외교는 막을 내리고 친명반청(親明反淸)이 외교노선의 근간이 된다. 임진왜란으로 명의 국력이 쇠미해진 틈을 타서 만주의 여진세력을 성공적으로 규합한 누르하치는 1616년 자신을 ‘칸(황제)’으로 칭하고 ‘천명(天命)’이란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1626년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후금의 2대 칸이 된 태종 홍타이지는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으로 촉발된 ‘이괄의 난(1624)’으로 조선침략의 빌미를 얻는다. 이괄의 난에 연루된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달아나 인조정권의 부당성과 조선의 친명외교를 거론하며 침략을 종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발발한 것이 1627년 정묘호란이다. 강화도로 도주한 인조는 후금의 ‘형제맹약’에 동의함으로써 화의(和議)가 성립된다. 그러나 조선이 친명배금 정책을 지속하자 1636년 12월에 태종이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누구의 나라인가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소설 <남한산성>과 영화 <남한산성>에 공히 나오는 표현이다. 후금의 위협과 이괄의 난을 겪은 인조가 1624년 개축(改築)을 명하여 1626년 완공을 본 난공불락의 요새 (要塞) 남한산성. 압록강을 넘은 지 불과 보름 만에 한양 도성에 청군(淸軍)이 도달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간다. 1만 4천여 군민(軍民)과 50일 분의 식량을 비축한 남한산성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달렸다. 반정으로 권력을 찬탈하고 두 차례나 호란(胡亂)을 자초한 암군 인조가 무엇을 어찌할 것인가, 궁금하다. 김훈의 소설을 읽으며 정말로 부아가 치밀어 오른 대목은 ‘망궐례望闕禮’가 나왔을 때였다. 궤멸직전의 중화제국 명나라 황제가 있는 북경을 향해 인조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성을 다해 올리는 군신(君臣)의 망궐례. 그것을 산정(山頂)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홍타이지. 조선을 으스러뜨리지 않고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투항을 받아내려는 태종. 청나라 칸에 맞설 계책을 거듭 묻는 인조에게 영의정 김류가 딱하다는 듯 말한다. “뭘 자꾸 물으시옵니까? 이 나라는 전하의 것이오니, 하명(下命)만 해주시면 저희는 그저 따르면 그만이 옵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는 영의정의 생각은 훗날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을 끌어들인 민비 민자영(閔慈映)의 생각과 빼닮았다. “내가 조선의 국모!”라고 일갈(一喝)했다던 민자영은 조선의 주인은 자기 자신과 고종이라 생각하여 조정(朝廷)을 향해 쇄도하던 동학교도들을 척살(刺殺)할 일본군대를 초치(招致)한다. 일본이든 청나라든 이왕가(李王家)의 소유권만 지켜준다면 단단히 보은하겠다고 외국군을 불러들인 민자영은 이듬해 당자(當者)가 끌어들인 일본군 낭인(浪人)에게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 체찰사 (體察使) 김류가 휘하막료를 거느리고 남한산성을 순시하다가 말고기를 뜯어 먹는 병사들과 말다툼을 벌인다. 가마니로 한기(寒氣)를 면하던 병사들이 굶어 죽어가던 말 때문에 가마니를 빼앗긴다. 김류는 말 없는 싸움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펴면서 병사들에게 내려주었던 가마니를 도로 빼앗아 말먹이로 쓸 것을 주장한다. 뾰족한 대책이 없는 인조의 명에 따라 병사들의 가마니는 말구유로 넘어간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가미니 역시 동나고 급기야 말들이 식용(食用)으로 병사들에게 제공된 것이다. “나리들, 말고기 맛 좀 보쇼. 그나저나 살이 붙어있을 때 잡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체찰사 김류는 군의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 말을 내뱉은 병사를 참수하려 한다. 수어사 이시백이 군령을 어겨가며 체찰사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 이조판서 최명길도 이시백의 편에 서서 김류를 제지한다. 병사를 참수하면 당장에는 군령이 설 것 같지만, 그들의 마음을 잃고 말 것이라는 논지를 전개한다. 남한산성을 지키는 최전선의 물리력은 왕이나 지식인 신료(臣僚)가 아니라, 무지렁이 백성들의 총칼이었으니 체찰사가 물러섬은 당연지사. 누가 조선의 주인인가, 혹은 조선은 누구의 나라인가, 하는 물음을 황동혁 감독은 몇 번이나 객석에게 던진다. 영화 첫머리부터 관객은 그 문제와 대면한다.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예조판서 김상헌을 건네준 이는 송파나루 사공이다. 어제 어가행렬(御駕行列)을 안전하게 인도했으나 사공은 왕한테 좁쌀 한 되도 받지 못했다. 사공은 내일이면 청나라 군대를 인도하고 뭐라도 받아서 생계를 꾸려갈 요량이다. 그가 남한산성 동행을 거절하자 상헌은 사공을 단칼에 베어 버린다. 눈 덮인 허연 얼음장 위에 검붉은 선혈(鮮血)이 낭자하게 흘러내린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조선 백성의 결기와 세계관을 드러내는 인물은 대장장이 서날쇠다. 소설 원작에 부재한 멜로드라마적인 인물 칠복이와 더불어 날쇠는 전란을 바라보고 대응하는 민의 관점을 대표한다. 산성에서 얼어가는 병사들에게 가마니를 주어서 한기를 덜어주라는 지혜를 예판 상헌에게 진언(進言)한 이는 날쇠였다. 그는 조선 병사들의 총신(銃身)이 휘어져서 온전하게 작동하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상헌에게 총신의 수리를 건의한다. 서날쇠가 <남한산성>에서 수행하는 막중한 임무는 인조가 보내는 격문을 조선군 근왕병 진영에 전달하는 것이다. 영의정 김류 대신 체찰사 노릇을 하는 김상헌은 격문을 전달할 최적의 인물로 날쇠를 지목한다. 완곡하게 임무를 거부하면서 날쇠가 말한다. “저희 백성이야 날이 밝으면 들로 나가 씨 뿌리고 그것을 거두어 생계를 이으면 그뿐입니다. 조정의 왕과 대신들이 명을 섬기든 청을 섬기든 그건 우리와 무관(無關)한 일입니다.” 지배계급이 떠받들어 모시는 사대(事大)의 대상이 한족(漢族)의 명이든 여진족의 청이든 조선의 민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날쇠의 주장은 근거가 있다. 날쇠의 말에 담긴 저의(底意)는 일찍이 요순시절에 불렸다는 <격양가(擊壤歌)>와 하등 다르지 않다. “일출이작 일입이식 (日出而作 日入而息)/ 착정이음 경전이식 (鑿井而飮 耕田而食)/ 제력어아 하유재 (帝力於我 何有栽).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쉬노라/ 우물 파 물 마시고 밭 갈아 내 먹으니/ 임금의 권력이 내게 무슨 쓸모더냐.” 조선의 권력층이 한족의 명을 상국(上國)으로 받들고, 여진의 청을 야만(野蠻)이라 능멸하여 일어난 전란의 일각(一角)을 받치던 날쇠의 생각은 사공과 다르지 않다. 어느 권력이든 국가를 지배-통솔하고 있다면 능히 그 나라의 백성을 배불리 먹이고 입혀야 한다. 그것을 온전히 행하지 못하면서 민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정치권력은 천부당만부당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최명길의 길, 김상헌의 길

영화 <남한산성> 첫머리에 등장하는 또 다른 인물은 이조판서 최명길이다. 김류와 더불어 서인의 인조반정에 참가하여 능양군을 보필한 인물 최명길. 그가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청군 기마대와 궁수부대 앞에 서 있다. 적들은 그에게 화살세례로 겁박(劫迫)하고자 한다. 전혀 위축되지 아니하고 적들의 무례를 꾸짖는 최명길. 조선국왕 인조의 사신이자 이조판서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적장 용골대와 대면을 요구하는 담대한 인물 최명길. 역사는 그를 주화파(主和派)라 부른다. 애당초 청이 최명길을 통해 요구한 화친조건은 소현세자를 볼모로 달라는 것이었다. 소현세자 역시 나라를 위한 길이라 하여 순순히 응할 태세를 보인다. 그런 이판과 세자 그리고 중신들에게 벽력처럼 고함을 지르며 부당함을 아뢰는 자가 김상헌이다. 야만의 청에게 세자를 내주자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그의 주장에 조정의 분위기는 일신(一新)된다. 인조의 답답하고 어지럽던 흉중을 시원스레 뚫어주는 예판의 일갈. 명을 받들고 죽기 살기로 청과 싸워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자들을 척화파(斥和派) 혹은 주전파(主戰派)라 부르고, 그 대표자로 윤집, 오달제, 홍익한 같은 삼학사(三學士)와 예판 김상헌을 꼽는다. 이리 같은 야만족 청의 홍타이지에게 어찌 투항하여 목숨을 구걸하겠느냐는 대쪽 같은 결기와 주장을 내세워 만고(萬古)의 충절로 떠받들어지는 주전파.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김상헌이 볼모로 심양으로 끌려가면서 지었다는 시조다. 그러나 김상헌은 인조가 항복한 다음 안동으로 낙향한다. 1639년 청나라가 명을 정벌하려고 조선에 출병을 요구하자 반대상소를 올린 죄목으로 청에 압송된다. 6년에 걸친 억류생활 끝에 1645년 귀국한 인물이 김상헌이다. 위에 인용한 시조는 그때 상헌이 지어 읊은 것이다. 칠십 노구에 조국산천을 떠나 영어(囹圄)의 이국생활을 영위해야 할 고단한 운명을 구슬프게 노래한 시조가 아닐 수 없다. 영화에서 우리는 최명길과 김상헌의 불꽃 튀는 논리대결과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목도한다. 홍타이지의 최후통첩에 대하여 인조가 투항할 뜻을 글로 적은 이조판서 최명길이 한밤중에 국왕의 처소 앞에 부복(仆伏)해 있다. 눈이 하얗게 덮인 1637년 정월 대보름 전야(前夜). 들어오라는 인조의 명을 받드는 명길. “전하, 환궁하시더라도 상헌을 내치지 마소서. 그는 산성(山城)의 유일한 충신이옵니다.” “그대 또한 나의 충신이다!” 만고의 역적 소리를 들어야 했던 이조판서 최명길의 선택은 왕의 정치적인 죽음과 백성의 생물학적 삶이었다.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적의 아가리 속으로라도 기어들어가 삶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 명길의 논리다. 왕의 존엄하고 당당한 죽음을 주장하는 상헌에게 “치욕은 참을 수 있으나, 죽음은 견딜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치는 명길. 그런 주화파 이판의 주장에 대해 상헌은 “명길이 말하는 삶은 삶이 아니라 죽음보다 더한 것이어서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명이 네덜란드 대포를 모방해서 만든 것을 청이 탈취한 홍이포(紅夷砲)가 날벼락처럼 터지고 청나라 병사들이 물밀 듯 들이닥치면서 싸움은 너무도 쉽게 결판난다. 태종 홍타이지 앞에 무릎 꿇고 삶을 애걸하는 명길의 두 눈에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살육(殺戮)을 거둬달라는 이조판서의 애간장 녹이는 청원에 공격중지를 명하는 홍타이지. “그래, 이판은 투항의 조건으로 무엇을 얻으셨소.” “군왕의 폐위가 없고, 산성 내의 민과 군병을 살려주겠다는 약조입니다.” ‘삼전도의 굴욕’을 통해서 인조가 얻은 것은 왕의 자리를 보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代價)로 그의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조선의 50만 백성과 함께 청나라로 압송된다. 민간의 수많은 아녀자가 유린당하고 ‘환향녀(還鄕女)’와 ‘호로(胡虜)자식’이란 말이 만들어진 비통한 역사적인 사건 병자호란. 소현세자의 불의의 죽음과 봉림대군의 세자책봉과 즉위로 이른바 북벌(北伐) 논의가 성립된다. 하지만 그것은 오롯이 일부 지배계층의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았음은 지난 역사가 웅변하는 바다. <남한산성>은 전란을 바라보는 두 대신의 엇갈린 시선을 통해서 우리의 자세를 되묻는다. “당신이라면 주전파 최명길의 편에 서시겠습니까, 아니면 척화파 김상헌의 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렇게 영화는 우리에게 진지하게 묻고 있다. 새로운 세상은 어떤 것인가 인조가 일군(一群)의 신료를 거느리고 근정전(勤政殿)으로 들어선다. 바람이 휑하니 불고 단청마저 색이 바래서 무너져버린 사직(社稷)의 모습이 곳곳에 약여하다. 그들 무리 끄트머리에 이조판서 명길이 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 명길의 눈길이 허공중에 맴돈다. 어찌할 것인가, 앞으로 어찌될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 가득 찬 표정이다. 명길의 막막하고 대책 없는 얼굴과 황망한 걸음걸이가 그의 텅 빈 가슴속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대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것이오, 이판.” “군왕과 백성이 함께 하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하오. 그런 세상은 왕과 신하가 모두 죽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열리는 세상이오. 왕뿐만 아니라, 그대와 나 같은 신료가 전부 사라진 다음에야 열리는 세상이오.” 최명길은 홍타이지와 청나라 군대가 모두 물러간 다음 무너진 조선의 조정을 다시 세우고자 한다. 처참하게 붕괴된 종묘사직으로 아득해진 나라의 권위와 백성들의 안위(安危)를 예판 김상헌과 더불어 일으키고자 한다. 그러나 상헌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지금껏 이 나라를 지탱해온 국왕은 물론이려니와 왕을 보필해온 핵심 권력계층의 대대적인 물갈이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청산과 숙정(肅正)이 있은 연후에야 비로소 백성과 군왕이 함께 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임란이 끝나고 불과 30년이 지나지 않아 맞이한 정묘호란과 그것이 경과한 지 불과 9년 만에 들이닥친 병자호란. 거기서 상헌이 깨달은 것은 기존의 최고 권력자와 그를 떠받드는 신하들 무리로는 새로운 세상은 불가능하리라는 것이었다. 현상유지 정도나 가능할까, 그 이상의 신세계 도래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라는 것이 병자호란 마지막 체찰사의 통찰이었던 것이다.

과연 조선 역사에서 그런 세상, 임금과 백성이 함께 하는 새로운 세상은 진정 있었던가?!

한양과 남한산성 조선왕조 518년 도읍지는 한양이다. 한양을 한자로 쓰면 ‘漢陽’이 된다. 550년 동안 우심했던 혼란의 시기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중국의 최초 통일왕조 진나라의 수도가 함양(咸陽)이었음을 상기하시기 바란다. 일부 극성스러운 한국 노인들은 진시황 (秦始皇) 정(政)의 진나라가 오랑캐 서융(西戎)과 가까웠음을 내세워 유방(劉邦)의 한나라를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로 받들어 모신다. 그것의 외적(外的)인 표현을 조선의 수도 한양에서 부분적으로 찾을 수 있다. 어째서 진양(秦陽)이 아니라 한양(漢陽)이었을까?! 언제부터 그런 명칭으로 오늘의 서울을 불러왔을까, 궁금하다.

같은 이치로 한강은 ‘韓江’이 아니라, ‘漢江’이다. 그리하여 영화의 제목인 <남한산성>은 ‘南韓山城’이 아니라, ‘南漢山城’이다.

서울에는 남한산(南韓山)이 없고, 남한산(南漢山)만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치로 김상헌이 청으로 압송될 때 불렀다는 삼각산(三角山)은 북한산(北韓山)이 아니라, 북한산(北漢山)의 별칭(別稱)이다. 어째서 이런 명칭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되었는지 알고 싶다. 자랑스러운 우리 조상들이 그토록 사모해마지 않았다던 중화대국의 법통(法統)을 자랑한다는 한나라를 우러르고 섬기고자 지은 이름 아니겠는가?!


<논어> ‘자로 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명부정즉언불순 名不正則言不順, 언불순즉사불성 言不順則事不成, 사불성즉예악불흥 事不成則禮樂不興, 예악불흥즉형벌부중 禮樂不興則刑罰不中, 형벌부중즉민무소조수족 刑罰不中則民無所措手足.”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름이 바르지 아니하면, 말이 온전하게 나오지 아니하고, 말이 온전치 못하면, 되는 일이 없다.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와 악이 흥성하지 못하고, 예악이 흥하지 아니하면 형벌이 정확하게 적용되지 아니한다. 지은 죄에 합당한 형벌이 내리지 아니하면, 백성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선생님께서 장차 정치하신다면 무엇부터 하시렵니까?” 하는 자로의 질문에 공자는 “필야정명호!(必也正名乎!) 반드시 이름을 바르게 하겠노라!”고 답한다.

자로가 어리둥절해 하자 공자가 자신의 생각에 담긴 본질적인 의미를 육단논법으로 설명한 것이 위의 인용문이다. ‘이름’이 바르지 않을 경우 생겨나는 폐단을 낱낱이 열거하는 공자. 이름이 언어로, 언어가 일로, 일이 예악으로, 예악이 형벌로, 형벌이 백성들의 혼란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조선왕조 오백 년을 연면부절하게 이어온 저 뿌리 깊은 ‘사대근성’은 도성인 한양과 한양을 감싸고도는 한강과 그 한강과 한양을 호위하는 남한산과 북한산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확인한다. 이런 관행의 근저(根柢)가 한국인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최치원에 있음을 우리는 안다.

당나라에서 벼슬살이하고 <토황소격문>으로 문명(文名)을 날렸다는 고운 (孤雲) 최치원. 그가 귀국하여 신라의 지명을 중국식으로 고치고자 진력했음을 교과서는 가르치지 않던가. 영화 <남한산성>의 옥에 티 예조판서 김상헌은 대쪽 같은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는 영화의 어린 등장인물 나루에게는 두 번씩이나 거짓말을 해댄다.

그 하나는 나루의 유일한 핏줄이자 생명줄인 송파나루의 사공을 처단했음에도 그의 행방을 계속 수소문하는 모양새를 취한다는 것이다.

“어제는 어가행렬을 건네주고 내일은 오랑캐들에게 길을 안내하겠다니, 그게 말이 되는 거요?!” 조선의 예조판서와는 출신성분부터 일상과 세계관까지 하나도 같을 바 없는 사공을 베어죽임으로써 후환(後患)을 줄이려했던 김상헌. 그런 늙은 사공이 거두어야 했던 일점혈육 (一點血肉) 나루가 남한산성에 들어오게 되자 상헌의 시름이 깊어만 간다. 어린아이들을 유독 아끼고 사랑한다 해서 인조가 나루를 상헌에게 넘겨주지만, 예판의 얼굴은 어둡기만 하다.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할아비의 안부를 걱정하는 나루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상헌. 그가 영화 끄트머리에서 날쇠의 대장간을 찾는다. 상헌은 자신의 명운을 걸고 청과 대적(對敵)할 것을 주장했으나 지근 (至近) 거리의 근왕병은 끝내 오지 않았다. 외려 청의 대포세례와 사다리를 동원한 대대적인 공격이 정월 보름날에 남한산성을 혼비백산(魂飛魄散)으로 몰고 가지 않았던가. 우리는 김상헌이 다급한 전황(戰況)의 한가운데서 나루를 끌어안고 보살피는 모습을 본다. 전체의 판세가 아니라, 자신이 죽인 조선 민초의 어린 것을 보듬고 있는 체찰사 김상헌. 무엇인가, 이것은. 영의정이자 체찰사 김류가 무리하게 청군을 공격하다가 병사들을 헛된 죽음으로 인도한 장면과 묘하게 겹친다. 척후(斥候)도 내보내지 않고 무당의 점괘만을 믿고 의지하였던 체찰사 김류. 국운이 명재경각(命在頃刻)에 달렸건만 조선군 수장 체찰사 직함의 김상헌은 대포의 굉음과 가공(可恐)할 파괴력 앞에 납작 엎드려 있을 뿐이다. 1805년 현동 정동유 선생이 지었다는 <주영편(晝永編)>에는 조선에 없는 졸렬(拙劣)한 풍속 세 가지가 나온다. 그 하나가 바늘이고, 그 둘이 양(羊)이며, 그 셋이 수레다. 불과 이백여 년 전에 이 나라에 바늘이 없었다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현동 선생이 말하는 바늘은 물론 쇠바늘이다. 조선의 사대부 아녀자들은 알음알이로 바늘을 구해다 썼다. 우리는 그것을 순조 때 써졌다는 유씨 부인의 <조침문(弔針文)>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다. 소, 말, 개, 돼지, 닭과 더불어 전통적인 가축인 육축(六畜)에 들어있던 양이 없던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조선의 기후와 풍토가 양을 사육하기에 적합지 않은 것이리라. 그러하되 수레가 없었다는 것은 정말 수수께끼다. 인류가 말을 기르기 시작한 이후 재갈과 고삐 그리고 등자(鐙子)가 발명됨으로써 훗날 크고 작은 전쟁에서 중차대한 구실을 한 것이 전차(戰車)다. 전시 아닌 평시에는 우마차가 각종 공사물자와 화물운송에 긴요했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일이다. 그런데 19세기 초까지도 조선에 수레가 없었다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동양의 고전 중의 고전인 <삼국지>에 학익선을 들고 마차에서 전군(全軍)을 지휘하는 제갈공명 이야기는 삼척동자도 익히 알고 있다. 대체 이 나라의 허다한 선비들은 그런 수레를 보기라도 한 것인가.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 선생은 “조선의 백성들이 굶주리고 도탄(塗炭)에 빠져 있는 것은 모두 사대부들의 잘못”이라고 일갈했다 한다. 이미 중국에서는 이천년 훨씬 이전에 일상화됐던 수레가 조선에 없었다니 말이 되는가?! 그래서일까. 영화에서 병사 하나가 손수레를 끌고 가는 장면이 나온다. 1637년 한겨울 추위에 남한산성에서 바지런한 몸짓으로 수레를 끌고 가는 조선병사. 이런 옥에 티가 못내 아쉬운 영화가 <남한산성>이다.

글을 마치면서

영화가 끝날 무렵 영화관 안으로 두 남녀가 화급(火急)하게 발걸음을 들인다. 조명이 환하게 들어오고 자막이 흐릿해져서야 비로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제야 확인할 수 있었다. 11월 초하루 9시 10분 조조할인 <남한산성>의 유일무이한 관객이 나였음을. 뭔가 이상한 느낌이 찾아들었다. 허전하기도 하고 상큼하기도 하고 쌉싸름한 맛이 느껴지기도 하고. ‘상당히 잘 만든 영환데, 이토록 관객이 들지 않다니...’ 2011년 개봉한 김한민 감독의 영화 <최종병기 활>에는 747만 관객이 들었다고 한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애국적인 영화가 <최종병기 활>이다. 쥬신타가 이끄는 육량시(六兩矢)의 청나라 대군에 맞서 조선 최고의 궁수 남이가 연전연승하는 영화 <최종병기 활>.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희망사항으로 만들어진 ‘국뽕영화’ <최종병기 활>. 2016년에 개봉된 <덕혜옹주> 역시 같은 길을 걸어서 560만 관객을 불러 모은다. 왜들 그럴까?! 역사는 영화라 해도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불편하고 아쉽다 해도 역사적 사실을 엿가락 주무르듯 훼손해서는 안 된다. 상상력의 범주와 허용 가능한 사실의 영역이 엄존한다. 영화나 드라마로 역사를 배우는 어린것들이 점차 늘어가는 21세기 영상의 시대에 연출가와 영화감독은 영화의 상상력과 역사적 사실 사이의 명징한 변별점은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영화 <남한산성>에 대한 불편한 마음과 냉랭한 평가가 인터넷에 차고 넘친다. 우리는 성공한 역사, 성공한 인간, 성공한 신화를 기대한다. 하지만 우리는 실패한 역사, 실패한 개인, 무너져버린 신화에서 배워야 한다. 오늘날 누구나 입을 모아 4차 산업혁명을 말한다. 정보통신이 주축을 이루어 인류역사의 신기원(新紀元)을 만들어가는 중차대한 시기라고 한다. 더 이상 그리스-로마신화 같은 이야기가 21세기에는 가능하지 않다고들 말한다. 과학과 기술이 포획(捕獲)한 역사적-신화적 상상력의 참람(僭濫)한 추락이 우리 곁에 있다. 그럴진대 처절하게 패배한 병자호란의 민낯을 낱낱이 그려낸 영화 <남한산성>을 차갑게 외면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인다. 병자호란과 불과 한 세대 거리를 둔 임란시절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라는 참담한 전란을 겪고도 반성하지 않은 썩어 문드러진 군왕과 그를 보필한 문무백관들의 낯빛이 우울하게 다가온다. 영화에서 인조가 보듬었던 상헌과 명길이 있었기에 그나마 사직을 보존할 수 있었던 무능하고 무기력한 조선왕조의 역사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그것을 영화 <남한산성>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