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서상국의 시인의 저녁

김규종 서상국의 시인의 저녁

18시 15분

누구나인문학

1월 25일 영화 <암살>



재미도 있고, 싸가지도 있다(?!) (<암살>)


최동훈 영화는 재미있다. <타짜>(2006)에서 김혜수가 “나 이래 봬도 이대 나온 여자에요!” 말할 때 완전히 넘어갔다. 한국에서 이대의 의미가 영화판에서 어떻게 전복될 수 있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상상력으로 친다면 <전우치>(2009)가 윗길이다.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장르의 특성을 십분 살린 영화니까.

<타짜>와 <전우치>로 1,100만 관객을 모은 최동훈은 <도둑들>(2012)로 단칼에 1,300만 고지를 넘는다. 호화 캐스팅도 화제였지만, 영화의 짜임새와 속도감, 반전이 한국판 할리우드 영화 가능성을 보여준 덕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최동훈 영화는 재미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암살>은 뭔가 색다르다?!

<암살>의 시간

​<암살>의 시대는 1933년에 집중된다. 그 해는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가 거사를 일으킨 이듬해다.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 8일 동경 한복판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진다. 같은 해 4월 29일 상해 홍구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일제의 거두들에게 폭탄을 투척한다. 두 분은 1932년 교수형과 총살형으로 순절한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부터 만 22년이 지난 시점에 펼쳐진 의로운 폭탄 투척!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를 만방에 떨친 쾌거였다. 윤봉길 의사의 거사에 대해 장개석은 “중국의 100만 대군도 못 한 일을 조선 청년이 하다니, 윤봉길 길이 빛나리라”고 칭송한다. 그런데 식민지 심장 경성은 어떠했는가?!

1920년대 말 30년대 초 경성풍경을 만문만화로 그려낸 인물이 석영 안석주다. 그의 만화에 기대어 당대 풍속도를 재조명한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에서 우리는 영화의 시간을 가늠할 수 있다. 일본에서 들어온 의상, 유성기, 양키 문화, 백화점 같은 신문물이 신세대를 사로잡는다. 거기서 생겨난 어휘가 모던뽀이, 모던껄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정반대의 풍경이 펼쳐졌다. 모던뽀이와 모던껄로 표현되던 당대 청춘들의 생활상은 가히 절망적이다. 대다수 모던뽀이와 모던껄은 조국의 독립과 해방 같은 문제에 무관심한 채 부나방처럼 향락과 소비문화에 굴복하고 살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만주와 중경, 상해 그리고 동경의 양상은 매우 달랐다.

<암살>의 공간과 인물

<암살>의 공간은 풍성하다. 항주에 자리한 임시정부와 상해, 암살의 거사 장소 경성, 독립군의 거점 만주, 경성의 백화점에 묻어나는 동경. 그러니까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일본과 중국의 풍광과 사물과 인간이 경성에서 뒤얽히고 있다. 그것은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인들의 일상생활과 사유의 영역이었다.

​해방과 분단으로 우리는 70년 세월 유라시아 대륙에 대한 상상력을 상실했다. 우리는 250킬로미터 휴전선으로 가로막혀 있는 섬에 사는 국민이다. 해괴한 것은 육로로 중국과 러시아에 가지 못한다는 자명한 사실마저 잊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하와이 피스톨까지 등장시키면서 우리가 망각한 상상력을 복원-확대한다.

다채로운 공간에 입체감을 더해주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조선의용대장 김원봉 같은 실존인물과 일군의 가상인물이 그들이다. 전형적인 일제부역자 강인국과 그와 대립하는 아내, 안옥윤의 쌍둥이 동생 미츠코. 경성의 모던카페 ‘아네모오네’의 마담과 일본인 기둥서방. 하지만 관심을 끄는 인물은 단연코 염석진이다.

​데라우치 총독을 단독으로 암살하려 했던 희대의 영웅 염석진. 그는 장편소설 주인공처럼 복잡한 내면세계를 가진 중층적인 인물이다. <암살>에 염석진이 없었다면, 영화는 지금 같은 성과와 흥행을 이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광수나 모윤숙, 안석주 같은 자들의 변절에 우리가 아쉬워하는 대목을 일부 석명(釋明)하는 염석진.

​염석진과 한국 현대사

​<암살>에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대목 가운데 하나가 ‘반민특위’ 재판정 풍경이다. 1948년 만들어진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의 약칭이 ‘반민특위’다.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산하고 친일 부역한 자들을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삼은 자가 김무성이 국부로 모시는 이승만이다. 재판정에 출석하여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염석진.

허다한 ‘염석진들’이 실권을 장악한다. 약산 김원봉은 모진 경험을 한다.

​"경찰서에 붙잡혀 가서 대표적인 악질 친일파 노덕술한테 뺨을 맞고 욕설을 들었다.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왜놈들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고 모욕을 당했으니…. 의열단 활동을 같이했던 유석현 집에 가서 꼬박 사흘간 울었다." (김원봉의 회고)

영화는 약산의 고통을 따스하게 어루만진다.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어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염석진 같은 일제의 주구가 맞이해야 할 최후를 선물한다. 그래서인지 <암살>은 김한민의 <최종병기 활>(2011)을 연상시킨다.

<암살>에서 읽히는 <최종병기 활>

병자호란 당시 처절하게 짓밟힌 조선의 산하와 인조의 굴욕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덧칠한 영화가 <최종병기 활>이다. 활 하나 가지고 막강한 청나라 대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영웅주의이거나 천우신조를 바라는 나약함과 다르지 않다. <최종병기 활>은 실제 역사와 무관한, 감독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희망 사항이었다.

​<암살>도 같은 노선 위에 있다. 윤봉길 의사의 거사 이후 근근이 명맥을 유지했던 독립운동, 허다한 모던뽀이와 모던껄의 등장과 사회문제화, 일제에 편승한 지식인 앞잡이들과 부역자들, 이승만의 행악질로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반민특위’, 온전하게 이뤄지지 못한 친일 부역자들의 단죄. 그것이 결과한 어두운 한국 현대사.

​그러하되 <암살>은 몇몇 문제를 제기한다. 당신이라면 염석진이 아니라 안옥윤의 길을 가겠는가. 암담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겠는가. 민족화합이라는 명분으로 모두 용서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남북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약산은 어찌할 것인가. 청산하지 못한 100년 과거사를 어떻게 정리하여 미래로 나아가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