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 우리 사회의 역동성을 상징했던 '개천에서 용 난다'는 신화가 종말을 고하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은행이 발표한 보고서는 우리 사회가 부모의 소득을 넘어 '어느 지역에서 태어나 자랐느냐'가 인생의 계층을 결정짓는 이른바 '지리적 계층 고착' 단계에 진입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개천에서 용 안 난다"···80년대생이 마주한 대물림의 벽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자녀에게 대물림되는 정도를 나타내는 '소득 백분위 기울기(RSS)'는 1에 가까울수록 대물림이 강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의 전체 평균 RSS는 0.25로 미국(0.35)이나 영국(0.30)보다는 낮지만, 덴마크·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0.18~0.20)나 독일·프랑스보다는 높은 수준입니다.
문제는 대물림의 고리가 최근 세대로 올수록 견고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1970년대생 자녀 세대에서 이 기울기는 0.11에 불과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북유럽보다 이동성이 높았던, 이른바 '개천 용'이 아주 활발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생에 이르러 0.32로 3배 가깝게 급등하며 미국 수준에 육박하게 됐습니다.
특히 주택 자산 대물림 수치는 0.42까지 치솟아, 이제는 본인의 소득보다 부모의 자산이 경제적 계급을 결정하는 핵심 변수가 됐습니다.

"수도권은 넓은 강···지방은 말라붙은 개천"
이번 분석에서 주목할 점은 '이주 효과'의 극심한 비대칭성입니다.
수도권 출신 청년들은 굳이 타지로 떠나지 않고 권역 내에서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상향 이동의 기회를 잡았습니다.
수도권 내 이주 그룹의 RSS는 0.06으로 사실상 '완전한 기회의 평등'에 가까운 역동성을 보였습니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혹은 인천에서 판교로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양질의 인프라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소득층 자녀에게 이 효과가 뚜렷했습니다.
비수도권 저소득층은 서울로 오고 싶어도 막대한 '이주 비용' 때문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수도권 저소득층은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도 서울 상위권 대학이나 대기업 일자리에 도전하며 '지리적 이점'이라는 사다리를 탔습니다.

사라진 거점 도시의 사다리···고향 지키는 청년의 '굴레'
반면, 대구·경북을 포함한 비수도권 청년들에게 '지방'이라는 개천은 더 이상 용을 키워내지 못합니다.
과거(50대)에는 지역 거점대와 수도권대 졸업생의 소득 차이가 거의 없었지만, 현재(30대)는 그 격차가 8.5%p까지 벌어졌습니다.
지방 저소득층 자녀가 고향에 남을 경우, 다시 저소득층에 머무는 비율은 과거 50%대에서 최근 80% 이상으로 치솟았습니다.
지방에 남은 청년 10명 중 8명은 부모의 가난을 그대로 물려받고 있는 셈입니다.
결국 수도권 출신은 권역 내 이동만으로 소득 상승을 누리는 반면, 비수도권 출신은 거점 도시로 이동해도 과거만큼의 개선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의 서울행은 정답이었지만···우리 동네는 소멸 중입니다"
지방의 열악한 환경을 피해 수도권으로 가고 싶어도, 이 역시 부모의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합니다.
부모 자산 상위 25%와 하위 25% 자녀의 수도권 이주 확률 격차는 43%p에 달했습니다.
정민수 한국은행 지역경제조사팀장은 이 현상을 합리적 선택이 낳은 역설로 풀이했습니다.
정 팀장은 "청년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 수도권으로 향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개인의 선택이지만,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주거비 부담과 인구 밀집이 결국 저출산과 지역 소멸이라는 국가적 파멸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수도권에 가지 않으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구조가 청년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지역 거점 도시를 다시 '큰 강'으로 만들어야"
한국은행은 이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별 비례 선발제' 도입을 제안했습니다.
교육 기회의 불평등을 해소해 당장 무너진 사다리를 보수하자는 취지입니다.
하지만 정 팀장은 "가장 근본적인 것은 지역의 산업과 교육, 일자리의 경쟁력 회복"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모든 지역에 예산을 쪼개 쓰기보다 대구와 같은 거점 도시와 대학에 획기적인 '패키지 투자'를 해서 수도권에 가지 않아도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강한 개천'을 복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역 간 격차가 계층 이동의 단절을 낳고, 이것이 다시 지역 소멸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대구·경북의 청년들에게 서울행만이 유일한 사다리가 되지 않도록, 지역의 작은 개천을 다시 깊고 넓은 강으로 살려내기 위한 실질적인 정책 전환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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