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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검사 임은정]① "저는 대구 시민입니다"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준 부모님의 희생과 헌신을 잘 알기에, 차마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부모님이 저에게 바라시는 꿈을 저도 꾸었습니다. 마침 부모님과 함께 꾼 꿈이 제 적성에 맞아 후회 없이 21년째 검사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사춘기 때 외모와 가난에 대한 열등감으로 좌충우돌 방황하기도 했지만, 대개 부모님과 선생님께 칭찬받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사법시험도 그리 늦지 않게 합격하여 20대에 '영감님' 소리를 들으며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2001년 첫 임지에서부터 낯설고 기괴한 현실을 참 많이도 보고 듣고 겪었습니다. 추근거리는 검사장을 퇴치할 방법을 고민하는 동기 검사에게 "달리 해결해 줄 선배가 없으니 직접 싫다고 말하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저는 술자리를 주재한 부장검사가 스폰서 지갑에서 꺼낸 돈을 검사들에게 나눠주었을 때, 초임이라고 몽블랑 볼펜까지 덤으로 주는 걸 싫은 내색 못 하고 받았지요. 제가 배운 이론과 현실이 너무 달라 어지러웠습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온한 간부들과 선배들을 곁눈질로 살피며 '아무 일 아닌가 보다' 하고 생각을 정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계속 가보겠습니다> p.13

[김근우 MC]
검찰 내에서 각종 부조리를 폭로하면서 임은정 검사께서는 주목을 많이 받으셨는데, 검찰의 구성원으로서 검찰과 싸워왔던 10년간의 기록을 책으로 묶어내셨습니다.

책 제목이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계속 가보겠습니다'인데요.

제목도 임은정 검사의 꼿꼿한 의지를 담고 있는 것 같죠?

지금은 대구지방검찰청에 근무를 하고 계신데 임은정 부장검사 오늘 만나보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임은정 검사]
반갑습니다. 대구지검에 근무하고 있는 임은정 검사라고 합니다.

[김근우 MC]
환영합니다.

[임은정 검사]
네, 대구 시민입니다.

[김근우 MC]
그런데 아까부터 제가 이제 말씀을 드렸었는데 오랜만에, 고향이잖아요? 영남 지역이 어쨌든, 부산 출신이시잖아요? 그런데 영남 지역에 오니까 조금 이제 사투리가 다시 살아나신 것 같다고···

[임은정 검사]
그렇죠. 예전에 제가 2003년에 경주지청에 발령 났을 때는 서울에서 오래 살다가 대학교 때부터는 서울에 살았으니까, 하다가 경주에 왔더니 서울말 쓴다는 말을 경주 시민들한테 들었었는데, 그런데 금방 다시 억양이 살아나는 거잖아요? 그래서 여기 왔더니 다시 사투리가, 억양이 심해지고 있어서···

[김근우 MC]
정확히 대구에는 언제 오신 거예요?

[임은정 검사]
올해 5월 말에 왔습니다.

[김근우 MC]
올해 5월 말에···

[김규종 MC]
그러면 두 달 정도밖에 안 되네요? 굉장히 생생한 느낌이 있으실 것 같은데···

[임은정 검사]
그래도 다른 여기 발령 난 사람들은 주민등록을 안 옮기잖아요? 전 대구 시민입니다.

[김규종 MC]
그 점에 대해서는 아주 적극적으로 환영합니다.

[김근우 MC]
그런데 5월에 대구에 오셨으면 그럼 지방선거 때도 대구에서 투표를 하셨겠네요?

[임은정 검사]
그때는 이사가 아직 덜 돼서 전입신고를 하려고 청 근처에 갔더니, 제가 수성못 근처에 사는데 그쪽 주민센터로 가라 그래서, 약간 일찍 퇴근해야지 전입 신고가 되잖아요? 한 번 놓쳤더니 그렇게 되더라고요.

[김근우 MC]
아쉬운 기회를 놓치셨네요.

[김규종 MC]
그런데 하여튼 대구에 처음 살게 되신 것 같은데 대구가 이를테면 다른 데서 보면 보수의 아성, 변하지 않는 섬, 어떤 심한 젊은 친구들은 고담 시티로까지 부르는 게 대구인데, 지금 두 달밖에 안 됐지만 임 검사께서 느끼신 대구, 어떻습니까, 느낌이?

[임은정 검사]
제가 좀 사람들은 저를 되게 진보로 보는 분들도 있는데 어찌 보면 저는 역사를 좋아해서요. 그러니까 그전에 대구가 여기 처음은 아니고, 여기 자주 한 번씩, 1년에 한두 번씩은 놀러 왔었어요.

여기 청라언덕도 가고 국채보상운동 그쪽 길도 가고 신암선열공원 같은 데도 제가 독립운동 그런 분들 좀 존경하니까. 또 여기가 이육사 시인도 활보하셨고, 제가 지난 주말에 이상화 시인의 생가 거기에 라일락 뜨락인가요? 카페에 가서 이상화 시인이 사랑했던 라일락 나무도 보고 왔는데. 그런 것을 보니까 고루하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여기는 저항 정신과 우리 민족의 얼이 있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라서 저는 뭐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고요.

무엇보다도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걱정하시는 분들이 제가 구박받을까 봐 저에게 걱정하지, 위축되지 말라고 현수막도 걸어주시고 막 환영해 주시는 눈빛들, 그리고 지나가다가 굳이 잡아서 응원한다고 말씀해 주신 분들 많아서 서초동에 있을 때보다는 따뜻한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김규종 MC]
그래요? 굉장히 축하할 만한 일이네요.

[임은정 검사]
감사하죠.

[김근우 MC]
대구하고는 그전에 인연이나 이런 것들은 따로 없으셨어요?

[임은정 검사]
그러니까 제가 2003년이, 경주지청에 왔을 때가 대구지검이 본청이라서요, 왔다 갔다도 많이 했고. 친한 친구가 대구가 있어서 대구에서도 자주 모였었거든요? 사법연수원 우리 반 여학생들끼리 계 모임 같은. 대구지법 앞에 예전에 MBC가 옆에 있었지 않습니까? 검찰청, 법원. 그래서 거기서 우리 친구가 법원에 있으니까 자주 모였었죠.

[김규종 MC]
범어동 1번지가 대구문화방송국 자리였는데. 하나 궁금한 게 아까 여성 동지들끼리만 따로 모이셨다고 그랬는데, 계 모임이 있고. 혹시 성별이 어느 정도 됐던가요, 임 검사 합격하셨을 당시에?

[임은정 검사]
사법연수원 700명 합격했던 시대인데요. 여자 연수생이 124명으로 기억을 하니까. 한 29기부터 여자들이 늘기 시작해서 그렇습니다.

[김규종 MC]
그렇다면 지역별로 혹시 이를테면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혹시 기억나는 거 있으세요? 어느 정도 비율이다, 이런 게?

[임은정 검사]
그런데 저희 반의 저희 조는 몽땅 경상도였고, 여자 연수생들이, 저희 조는. 그래서 결과론적으로 약간 진주, 대구, 부산 이렇게 해서 우리끼리 경상도 말을 시원하게 썼죠.

[김근우 MC]
지금도 좀 시원하게 쓰고 계신 거예요?

[임은정 검사]
그렇죠. 그러니까 거기서 서울에 있으면서도 서울말 같지 않은 그렇게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됐습니다.

[김근우 MC]
확실히 이제 고향 가까운 곳에 오시다 보니까, 그런데 프로필에는 고향이 포항 쪽으로 돼 있으시더라고요?

[임은정 검사]
포항의 해병대 훈련장 거기가 저희 증조부 묘가 있어서, 저희 나주 임씨 집성촌이 장기 임중리에 있어요. 그래서 제가 좀 우스갯소리를 하는 게 조선시대 말 좀 하시던 분들 다 유배를 장기로 오셨잖아요? 포항에서 좀 말 좀 한다 하신 분들 다 장기 분이시거든요? 제가 장기 사람이라고 그래서 말 좀 한다고 제가 좀 이렇게 농담처럼 하고 있습니다.

[김규종 MC]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시군요?

[임은정 검사]
그렇죠.

[김근우 MC]
사실 제가 오기 전에 프로필도 확인을 하고 왔습니다마는 사실 좀 생소했던 얘기가 원래는 검사가 아니라 작가를 꿈꾸셨다, 이런 얘기도 제가 봤거든요? 그런데 언제부터 갑자기··· 작가하고 검사는 너무 좀 거리가 있지 않나요?

[임은정 검사]
그러니까 약간 어렸을 때부터 주입식 교육의 산물로,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저희 어머니가 막내딸을 법관 만들고 싶어 하시는 꿈을 가지셨기 때문에 그러면 내가 하겠다고 하고, 작가는 약간 부업의 개념인데요.

그냥 엄마, 아빠가 원하시는 게 딸이 법대 가서 이쪽에 일하길 원하셨으니까 그걸 하면서, 초등학교 때 글짓기상 다 받지만 저도 시로 전체 장원상, 글짓기 백일장 했을 때 학교 대표로 시 대회도 나가고 그래서 나름 글을 초등학교 때는, 그게 뭐가 중요할까 싶지만, 그때 상을 받고 시 좀 쓴다고 말을 들어서 그때는 노벨 문학상을 받고 싶은 문학소녀였었어요.

[김근우 MC]
진지하게 꿈을 꾸셨나요?

[임은정 검사]
조금 생각은 했었는데 제가 이번에 제 책 앞에 보면 사인 보면 아시겠지만 글씨를 되게 못 쓰거든요? 그래서 예전에는 수사 지휘를 워드로 안 치고 손으로 쓸 때가 있었는데 제가 부장님들한테 많이 불려갔어요. "네 글씨, 초등학생 글씨"라고. 이렇게 글씨를 하도 못 쓰니까 글씨를 중시하시는 선생님을 만나서 상을 못 받기 시작하면서 초등학교 6학년 때 절필을 하는 바람에···

[김규종 MC]
그때 절필하셨어요?

[임은정 검사]
우스갯소리지만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 적네, 그러면서 글짓기 꿈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김규종 MC]
졸필이면 혹은 악필이면 대개 천재라는 말이 옛날에서부터 있었는데 그런 생각은 안 해 보셨어요?

[임은정 검사]
아니, 그러니까 제가 하도 글씨를 못 쓰니까 그때 인천 초임 때 차장님이 "자네가 이 글씨로 사시를 붙은 걸 보면 자네는 천재야" 뭐 그런 말씀을··· 설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도 내 글씨를 못 알아봐서 점수를 그냥 무난하게 줬다는 설과,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김규종 MC]
절대 그런 법은 없습니다. 채점자 입장에서 보면 악필이면 감점하지, 성적 안 올려줘요. 안 읽히거든요? 짜증 나서.

어쨌거나 법조인, 그 가운데에서도 법조의 길로 들어섰을 때 나는 이런 검사가 되겠다, 어떤 검사상 같은 게 있었습니까?

[임은정 검사]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냥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았고요. 우리 집이 좀 못 살고 부산에서 조그만 슈퍼를 하시면서 부모님이 공부를, 돈이 없어서 학교를 제대로 못 다니셨기 때문에 약간 돈 없고 딸만, 딸 부잣집에 이렇게 돼서 좀 동네에서 좀 무시하시는 분들 있잖아요?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가 자식들한테 올인하면서 좀 그러신 점이 있었는데 저도 부모님 생각하면서 성공하고 싶고 내가 사시를 붙은 순간 이제 내 앞에는 스포츠카 탁 타고 아스팔트 쫙 달리는 멋진 상류 사회를 꿈꾸던 권력을 착착하면···

제 초임 때 2001년도에 머리가 허연 경찰서 과장님이 "영감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런 것들을 제가 2001년도에 보면서 쇼킹하면서 '나 이제 성공했나 보다, 잘 살 건가 보다' 이렇게 철없이 생각했던, 아무 생각 없이 휩쓸려서 여기서 1등하고 싶고 출세하고 싶고 그랬던, 평범하고요 성공 지향적인 검사였습니다.

그냥 원래 딱 검사를 하면 이렇게 가는 코스들 있잖아요? 그 코스를 가기 위해서 열심히 한.

[김규종 MC]
되게 솔직하시네요?

[김근우 MC]
그랬던 임은정 부장님께서 지금은 사실은 꼬리표를 좀 갖고 계십니다. 내부 고발자다, 또는 항명한 검사다, 사실은 이 잔 다르크 같은 일종의 좀 전사의 이미지가 오늘 저는 만나 뵙기 전에도 조금 생각을 하면서 왔거든요?

실제로 만나 뵈니까 전혀 그런 이미지가 또 아니시고 실제로 책을 봐도 굉장히 감성적이고 또 따뜻한 분으로 느껴지던데. 이 갭의 원인이 뭘까요,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게? 외부적인 이미지가 그런데?

[임은정 검사]
그러니까 제가 감성적이에요. 감정이 메마르지는 않았고요.

[김근우 MC]
오늘 만나 뵈니까 알 것 같아요.

[임은정 검사]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감정이 메마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공감 능력이 저는 있다고 생각해요. 감정이 메마르기 시작하면 내 앞에서 지금 피해를 받고 고통받고 내지는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저 사람들이 강 건너 불구경이 되거든요? 이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 귀 기울이기가 한 치 건너 두 치인 데 멀리 보이게 되면 이제 사람이 아니라 사건으로 보고 처리해야 할, 건건이 숙제 같은 짐같이 보이는데, 저는 감수성이 메마르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고통이나 내지는 사건이 어그러지거나 이런 것에 대해서 고민을 좀 더 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가 겁이 없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욕심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닌데 참을 수가 없는 거,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저는 제가 초임 때 그렇게 했던 건 이렇게 해도 부끄러웠거나 나쁜 짓을 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초임 때 스폰서 달고 성매매 나가는 부장님, 우리는 성매매, 그때는 윤락행위 방지법이었는데 저 분은 끝나고 회식으로 2차로 성매매 스폰서 나가고, 이상하다 이상하다 계속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면서도 그래도 대게는 잘 모르지만 법대로 웬만하면 청탁이 있는 건 아니고 법대로 처리하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열심히 하면 정의를 나름의 구현할 수 있고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다가 고민은 깊어진 거죠.

윤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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