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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② "대구는 박정희 고향·보수의 심장?···전태일 고향·진보 용솟음치는 곳이길"


전태일 열사는 대구가 경북이던 시절인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로 이사를 갔다가 대구로 내려온 뒤 다시 서울로 상경해 서울 평화시장에서 시다, 재단사 등으로 일했습니다. 1969년 평화시장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고 근로기준법 위반에 대한 설문조사를 해 노동청에 진정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면서 분신했고, 그날 밤 숨을 거뒀습니다.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된 전태일 열사가 살았던 대구의 옛집을 복원하자는 움직임이 추진됐는데요, 5년 만에 첫 삽을 떴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기리는 기억 공간이 만들어지는 건데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과 복원 작업에 참석한 시민들에게서 직접 들어봤습니다.  
최기현 건축사·(사)전태일의친구들 이사
1950년대 한국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전태일 선생님이 사셨던 공간은 지금 벌써 없어져 버렸어요. 하지만 주인이 살았던 공간, 그 공간이라도 저희가 쓰러지지 않게 그렇게 복원하는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고요.
이러한 공간 구조라도 저희가 잘 보존해야지 전태일 정신이 어떻게 보면 그 증거로써 이 공간에 남길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하여튼 한 분 한 분 작은 돈을 이렇게 후원해 주셨는데 저희가 허투루 하지 않고 그리고 아껴가면서 이렇게 복원하려고 합니다.
김석균 흙건축연구소 살림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전태일이 어렸을 때 살던 공간을 다들 어떻게든 되살리고 싶을 텐데 도시에서 그런 공간을 다시 찾는다는 거, 그리고 그걸 매입하기 위해서 돈을 모으고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그 일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되게 감동을 받았었어요.
그런데 마침 그 공간을 다시 복원해서 좋은 쓰임으로 만든다고 해서 또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오래된 옛집들을 되살리는 일을 하는 거라 그러면 힘을 좀 같이 보탤 수 있는 기회를 주면 함께 했으면 좋겠다 해서 오게 됐고요.
아마 이 집이 뒤로 많이 넘어가 있어서 바로잡고 또 많은 사람이 와서 전태일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것 같습니다.
조선남 목수·시인
저는 이 집이, 전태일이라는 이름 자체가 생리학적 개인 전태일이가 아니라, 그 전태일도 있지만 사실은 전태일은 그 과정 속에서, 저만 해도 사실은 20대 때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읽으면서, 그 평전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노동 현장에 들어왔었듯이, 이후에 우리 후배들, 우리 동생들, 우리 아들딸들이 여기 와서 전태일을 기억하고 청소년 노동인권 교실이 되고 현장이 되는 그런 공간 그런 방향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 골목은 전태일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만나는 이런 공간이 되어야 한다, 저는 그런 생각 하고.
그런 방향을 이사님들과 의논하겠지만 그렇게 추진해 가는 이 집은, 전태일 주인집 이 집은 여기는 전태일 열사가 사셨던, 그런데 이 터가 사실은 전태일의 기본 정수인 거고, 그래서 대구가 박정희의 고향만이 아니라 전태일의 고향이 될 수도 있고, 보수의 심장만이 아니라 진보가 생명이 용솟음치는 그런 푸른 대구가 되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으로 여기에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이 집은 기념관인데요. 여기는 전태일 열사한테 세를 줬던 주인집, 이 주인집을 활용해서 저희는 기념관, 전태일 일기장, 그리고 저도 전태일 문학상 수상자인데 전태일 문학 작품들, 그리고 그 노동 현장에서 평생을 함께하셨던 이야기마당 (역할)하는 그런 기념관과 이야기 공간이 될 수 있는 그런 기억하는 그런 공간으로 만들기를 원합니다.
윤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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