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서상국의 시인의 저녁

김규종 서상국의 시인의 저녁

18시 15분

저녁인사

인연에 대하여

인연에 대하여


피천득은 수필 <인연>에서 아사코와 함께했던 세 번의 만남을

서정적인 필치로 그려냅니다. 아사코는 세월과 더불어 변해갑니다.

소녀에서 대학생으로, 마지막에는 점령군 미군의 아내로!

“초록색이 고왔던 아사코의 우산”이 저에게는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그의 설명도 따스합니다.

그는 마지막 만남은 아니 만나는 것만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의미 없는 절만 되풀이하면서 그들은 영원히 작별한 것이지요!

우리 모두에게는 나름의 고유한 인연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각 여러분 곁에 누가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바로 그가 여러분의 인연입니다. 그 인연을 소중하게 보존하십시오.

평안한 저녁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상실 (전문)


세배 자리에 아버지가 없다

등 굽고 아주 작은 늙은 어머니가

혼자 두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맑은 한 잔 소주도 없이

어머니 옆자리에 설핏 그림자 같은 것이

소리도 없이 지나간다

바람도 없는 거실에서 어머니 허연 귀밑

머리카락 몇 올 희미하게 흔들린다

세배 전에 생극 공원묘지에 다녀온다

높푸른 하늘과 하얀 눈들과

찬바람과 목소리들과 까마귀들과

승용차들과 발걸음들이 뒤얽혀 있다

아버지 산소에도 눈이 함초롬히 덮여 있다

동생의 막내 녀석이 아주 작은 눈사람을

할아버지 등 위에 올려놓는다

계수의 눈사람에 어머니는 이목구비를 달아 주시고

아버지 발치에서는 아우의 담배가

가느다란 연기를 허공에 흩뿌리고

머리맡에서는 당신의 소주가 눈과

하나 되어 대지로 흘러든다

어찌 음복이 없겠는가

서늘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차가운 소주

아버지와 나를 잇는 한 잔의 소주

다시 거실에는 아버지가 없다

마지막 날에 잔기침을 그리 많이 하시던

허연 머리털의 등 굽은 내 아버지가

더 이상 거실에 없다

더러 그 거실에서 소주를 생각하며

나는 아버지의 부재를 떠올린다

앞으로 소주를 마실 때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귀밑 머리털이 떠오를 것이다 시나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