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서상국의 시인의 저녁

김규종 서상국의 시인의 저녁

18시 15분

누구나인문학

6월 30일 책 <세기의 소설, 레미제라블>


​데이비드 벨로스의 <세기의 소설, 레미제라블>


글을 시작하면서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지난 2012년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처음 제대로 읽었다. 문고본이나 축약판 형태가 아니라 한글 완역판으로 위고의 대작을 읽은 것이다. <레미제라블>을 읽는 동안 주변 세계는 고요하고 작아졌다. 내 영혼과 육신의 매듭 하나하나가 위고가 창조한 시대와 인물과 사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레미제라블>을 대개 ‘장발장’으로 받아들이며, 그의 초인적인 능력과 회개, 코제트를 향한 인간적인 정을 기억한다. 거기에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풋풋한 사랑을 덧붙이면서 소설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소설 첫머리에 나오는 루이 16세의 처형과 공화정에 관한 미리엘 주교와 국민의회 의원 G의 논쟁은 이런 단선적인 판단과 결론을 단번에 날려버린다.

<레미제라블>은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가 끝난 직후에 장발장이 19년 형기를 마치고 출감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미리엘 주교의 자비에 힘입어 장발장은 마들렌이란 가명(假名)으로 몽트뢰유 쉬르 메르에서 사업가로 성공하고 시장 자리에 오른다. 거리의 여인 팡틴의 딸 코제트를 구해 파리로 잠입한 장발장은 1832년 6월 봉기에 가담하여 마리우스를 구한다.

이런 식으로 위고는 장발장의 개인적인 삶과 19세기 초 프랑스 사회의 격동을 보여준다. 프린스턴 대학교수 데이비드 벨로스의 서책 <세기의 소설, 레미제라블>은 위고가 남긴 위대한 소설의 여정(旅程)을 연대기적으로 추적한다. 지은이는 위고의 개인사와 프랑스의 역사적 변동 그리고 소설의 등장인물과 출간 및 현재적 의미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시각을 펼쳐 보인다.

빅토르 위고와 <레미제라블>

벨로스는 위고(1802-1885)를 조숙한 문학천재로 규정한다. 뛰어난 라틴어 구사능력을 가지고 있던 위고는 어린 시절부터 정형시와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1827년 운문희곡 <크롬웰>을 발표하여 낭만파의 기수로 등장하고, 1830년 초연된 비극 <에르나니>로 명성을 날린다. 이듬해에 그는 <파리의 노트르담>으로 대성공을 거둔다. 벨로스의 평가를 들여다보자.

“<노트르담의 꼽추>라고도 알려진 <파리의 노트르담>은 반세기 동안 유럽 문단을 평정한 괴테가 세상을 뜨기 1년 전에 출간되었다. 위고는 그에게서 유럽 최고 천재의 망토를 넘겨받을 준비가 돼 있었고 의지도 있었다. 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어 39세에 불후의 인물 40인 반열에 올랐고, 1845년에는 상원에 해당하는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32-33쪽)

1848년 2월 혁명으로 대통령이 된 루이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제2 제정을 세우고 나폴레옹 3세가 되자 위고는 강력한 저항자로 등장한다. “아우구스투스가 있었다고 해서 아우구스툴르스도 있어야 합니까. 큰 나폴레옹이 있었다고 해서 작은 나폴레옹도 있어야 합니까.” (97쪽) 이로부터 빅토르 위고의 고단하고 신산(辛酸)한 망명 생활과 <레미제라블> 창작이 이뤄진다.

1851년 12월 10일 자크 라방이란 이름으로 파리를 탈출한 위고는 벨기에로 망명했다가 1852년 영국령 저지섬에 도착한다. 1855년 건지섬으로 거처를 옮긴 위고는 1848년 2월 혁명으로 중단한 소설 <레미제르>를 꺼내 든다. 1860년 4월 25일의 일이다. 같은 해 6월 말 위고는 40일 밤과 낮을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에 관한 소설을 쓰려는 이유를 숙고했다고 전한다.

1861년 10월 4일 위고는 벨기에의 출판업자 라크루아와 <레미제라블> 출판계약에 서명한다. 현금 24만 프랑과 옵션 6만 프랑, 총 30만 프랑으로 출판 역사상 가장 큰 거래였다고 한다. 고전 비극의 5막 구조를 가진 <레미제라블>은 출간에 3개월이 소요되었다. 1부 팡틴은 1862년 4월 4일, 2부와 3부 코제트와 마리우스는 5월 15일, 4부와 5부는 6월 30일 완간되었다.

가난과 무지의 수난자 팡틴

몽트뢰유 쉬르 메르 거리의 아이였던 팡틴은 파리에서 낭만을 자처하는 대학생 톨로미에스의 애인이 되어 임신한다. 1817년 무일푼으로 애인에게 버림받은 팡틴은 파리 근교의 몽페르메유에서 여관주인 테나르디에 부부에게 코제트를 맡기고 귀향한다. 미혼모라는 사실이 밝혀져 팡틴은 마들렌 시장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쫓겨나 거리의 여자로 전락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레미제라블>에서 위고는 가난과 무지로 고통받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여성을 주목한다. 위고는 말한다. “남자의 비참함을 본 것으로는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과 같다. 여자가 비참한 경우에 빠진 것을 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톰 후퍼 감독의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팡틴이 경험하는 참혹한 삶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시민의 새로운 정치적 권리를 확립한 프랑스 대혁명도 민중의 가난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1837년 출간된 디킨스의 장편소설 <올리버 트위스트> 이후 빈곤 문제는 당대의 뜨거운 화제였다. 가난이 남자를 범죄로, 여자를 죄악으로 인도한다고 확신한 위고는 빈곤 타파가 국가의 의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미혼모 팡틴은 어떻게 빈곤의 덫에 걸려들게 되었을까.

“위고는 팡틴의 삶에서 갈수록 커가는 재앙을 그려낸다. 팡틴은 문맹(文盲)이고, 예상치 못한 임신을 하며, 아이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재정지원을 상실한데다가, 일자리를 잃고, 바느질 품삯이 떨어지고, 물리적으로 공격당하며, 체포당해 병까지 걸린다.” (57쪽)

한 마디로 팡틴의 삶은 가난의 덫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본보기라 할 수 있다. 가난과 더불어 팡틴을 파괴하는 치명적인 요소는 그녀의 문맹이다. ‘무상(無償)으로 교육하지 않는 사회는 범죄’라고 갈파한 위고는 <레미제라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프롤레타리아가 낳은 인간의 타락과 굶주림이 낳은 여성들의 도덕적 타락과 어둠 속 방치가 낳은 아이들의 위축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이 땅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런 책들이 쓸모없지는 않을 것이다.” (285쪽)

장발장의 위기와 변모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은 장발장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주인공들과 달리 장발장은 매우 과묵한 인물이다. 벨로스는 위고가 그려내는 소설과 장발장에 대해 흥미로운 견해를 제시한다.

“위고는 톨스토이처럼 소설에서 역사적인 사건의 의미에 관한 논평을 넣는다.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영혼의 드라마를 전하려고 하며, 디킨스처럼 가난을 속속들이 보여주려 한다. 장발장은 라스콜리니코프나 이반 카라마조프처럼 복잡하거나 자기 비판적이거나 비극적인 주인공이 아니며, 소설적인 인물도 아니다. 그는 성자도 아니며 새로운 인간의 본보기다.” (26쪽)

빵 한 조각 훔친 죄로 5년 형을 선고받은 장발장은 네 번에 걸친 탈옥시도로 19년의 수감생활을 견뎌야 했다. 출감 이후 그는 세 번에 걸친 도덕적-정신적 위기를 경험한다. 그 하나는 프티제르베의 동전을 빼앗은 것이고, 그 둘은 몽트뢰유에서 샹마티외가 누명 쓰는 것을 외면하려는 유혹이며, 그 셋은 마리우스와 코제트가 사랑할 때 느끼는 질투어린 분노와 상실이다.

프티제르베를 강탈한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의 영혼에 압도당해 회개함으로써 첫 번째 위기를 극복한다. 샹마티외 사건에서 장발장은 내면세계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지는 양심과 의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위기를 이겨낸다. 가련한 소녀에서 아리따운 아가씨로 상장한 코제트를 바라보는 복잡다단한 심사(心思)의 장발장은 홀연히 바리케이드로 나아간다.

“무거운 짐을 진 채 눈높이까지 찬 악취 나는 구정물을 헤치며 걸을 때 장발장은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에서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 같은 존재가 된다. 하수도 장면은 <레미제라블>을 19세기 양식소설보다 웅장한 그 무엇으로 만든다. 이 장면은 전설을 창조하고, 등장인물을 신격화한다.” (201쪽)

사경을 헤매는 마리우스를 어깨에 짊어지고 진창의 지하수로를 걸어가는 60살의 장발장. 몰락하면서 끝 모를 악으로 빠지는 나쁜 빈민 테나르디에와 달리 장발장은 위기의 국면을 차례로 극복하고 미리엘 주교의 자비로운 은혜에 보답한다. 장발장의 이야기는 계급이나 귀천과 무관하게 인간의 영적(靈的)이며 도덕적인 진보가 어떻게 가능한지 여실히 보여준다.

<레미제라블>이 남긴 뒷얘기들

위고의 동시대 작가들은 대중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레미제라블>을 혹평했다고 한다.

“보들레르는 <레미제라블>이 어설프고 고약하다고 말했다. 메리메는 <레미제라블>에 대한 대중의 열광은 인간이 원숭이보다 멍청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라고 했다. 뒤마는 <레미제라블>을 읽는 것은 수성에서 수영하는 것이나 진흙을 헤치며 걷는 것 같다고 불평했다.” (343쪽)

출간 이후 지금까지 <레미제라블>은 65편의 영화로 만들어져 세계에서 가장 자주 각색된 소설로 알려져 있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레미제라블>은 프랑스의 역사적-도덕적-지적인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바리케이드의 지도자 앙졸라는 말한다.

“그리스가 시작한 것을 프랑스가 완성할 만합니다. 유럽의 횃불, 즉 문명의 횃불은 맨 처음 그리스가 들었다가 이탈리아에 전했고, 이탈리아는 그것을 프랑스에 전했습니다. 거룩한 선구적인 국민들이여! 횃불을 들어 올리시오!” (346쪽)

<레미제라블>의 바리케이드 투쟁은 1832년 6월 5-6일의 봉기를 그려낸 것이다. 1830년 7월 혁명으로 등장한 루이 필립의 집권 초기에 시위 참가자 3천 명이 3만에 이르는 정부군과 국민방위대와 맞서 싸운 사건이다. 허다한 혁명과 봉기로 점철된 프랑스 역사에서 이 사건은 미미한 소동에 지나지 않았지만, 위고는 위대한 프랑스 혁명의 의미를 제시하고자 진력한다.

프랑스 대혁명은 그리스도 탄생 이래 인류의 가장 위대한 진보라고 위고는 소설에 썼다. 오늘날 민감한 정치적인 사안에서 프랑스를 바라보는 세계인의 시선은 근거가 있는 셈이다.

“프랑스를 근대사의 전면에 서게 한 것은 국가의 특성이 아니라 혁명구호에 담긴 자유, 평등, 형제애 같은 관대한 사상이다. 설령 예측하지 못한 결과와 악용이 따르더라도 위고는 이런 보편적인 가치를 변함없이 지지했다. 그때까지 자유와 평등의 균형을 시도하거나, 이 두 가지와 형제애적인 사회통합과 유대의 균형을 시도한 유럽의 정치조직은 없었다.” (347-348쪽)

위고는 1885년 83세로 영면하고, 200만이 참여한 장례행렬이 판테온까지 동행한다. 그전에도 그후에도 이런 대규모 군중이 파리에 모인 일은 없었다고 한다. 위고 사후 130년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그의 사유와 인식 그리고 열망은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세기의 소설, 레미제라블>, 데이비드 벨로스 지음, 정해영 옮김, 메멘토,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