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서상국의 시인의 저녁

김규종 서상국의 시인의 저녁

18시 15분

누구나인문학

1월 6일 책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철학자들은 어떻게 걸었을까?!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로제 폴 드루아 지음, 백선희 옮김, 책세상, 2017. 프랑스 철학자이자 작가 겸 저널리스트인 로제 폴 드루아의 신간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은 적잖게 흥미로운 서책이다. 인간의 걷는 방식과 산책, 도정(道程)을 관찰함으로써 생각의 움직임을 포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드루아는 우리의 걷기와 말과 생각이 긴밀한 혈족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논리는 아래와 같다. “인간은 걷기 시작하면서 말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어린아이는 같은 나이에 서서 조금씩 나아가고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문장을 이해하고 자기 생각을 말할 가능성을 터득하기 시작한다. 걷기는 인간이 되는 것이며, 걷고 생각하는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성찰의 길에 서게 된다.” (20쪽) 걷기와 생각하기와 말하기가 동일선상에 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직립보행을 하지 않았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드루아는 판단한다. 그런데 나는 일반적인 어린아이와 다른 행보를 보였다 한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나는 앉은뱅이로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일어나 걸었고, 어느 날 홀연히 완전한 문장을 말했다고 한다. 예외는 있는 법이므로?! 드루아의 서책은 고금동서의 저명한 철학자들의 걷기와 산책을 다채롭게 들여다보면서 종당에는 철학자의 걷기로 글을 맺는다. 고대의 도보자들과 함께, 동양의 도보자들과 함께, 체계적인 도보자와 자유로운 산보자들과 함께, 현대의 신들린 사람들과 함께 등 모두 네 차례의 산책이 등장한다. 각각의 항목에서 우리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철학적인 사유와 인식과 만난다. 고대의 도보자들 고대세계의 거주자들은 하나같이 걸었다. 고대 철학자들도 걸으며 생각하고 말하고 판단했다. 그들의 사유속도는 걷는 사람들과 같은 속도로 거리와 광장과 강과 바다를 건너 전파되고 혼융되었다. 그야말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이 하나의 세계 속에서 함께 숨 쉬고 살아갔던 황금시대가 펼쳐졌다. 그곳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유장한 사유와 인식의 시공간이었다. 엠페도클레스와 프로타고라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피론과 디오게네스, 세네카와 아폴로니우스가 드루아가 주목하는 인물들이다. 그중에서 플라톤을 생각해보자. <국가>를 쓸 무렵 플라톤은 동굴 속에 포박된 포로들을 상상했다고 한다. 오랜 세월 결박당해 사지(四肢)는 물론, 목조차 꼼짝하지 못하는 포로들. 그들은 눈앞에 비친 이미지, 즉 실물의 그림자 말고는 아는 것이 전무하다. 드루아는 이것을 ‘동굴의 비유’라고 규정한다. 그는 포로들을 현대의 영화관객이라 단정한다. 투사(投射)된 이미지를 현실로 수용한다는 이유로. 동굴의 비유에서 플라톤은, 우리는 감각의 허상(虛像)에 사로잡힌 포로이며, 진실은 가시적인 세계에 있지 아니하며, 저 너머 다른 곳에 있으며, 그것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하려면 동굴을 나와 바깥으로 나와 걸음으로써 영원한 이데아를 응시해야 한다. 진실을 깨달은 자는 동굴로 돌아가서 허상과 불의(不義)가 지배하는 동굴을 진실과 선으로 재건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그의 움직임은 이중의 걷기로 구성돼 있다. “하나는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무지에서 앎으로 가는 걷기다. 다른 하나는 반대로 앎에서 구세계로 돌아가는 걷기다. 무지를 일소함으로써 그 세계를 바꾸기 위해 아는 자는 현자와 학자가 되어 동료들을 허상과 예속에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런 상승과 하강의 여행이 플라톤의 전체계획을 구성한다.” (47쪽) 동양의 도보자들 드루아가 두 번째 산책에서 등장시키는 동양의 사상가들은 붓다와 노자, 공자와 힐렐, 샹카라와 밀라레파 등이다. 노자와 힐렐에 관해서 알아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노자는 푸른 소를 타고 석양 무렵 함곡관에 도달한다. 아침부터 상서로운 기운이 함곡관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낀 수문장 윤희가 노자에게 글을 청한다. 거기서 유래하는 것이 5천 자 내외로 기술된 <도덕경>이다. 노자는 거의 언제나 동물이나 마차를 타고 다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드루아는 노자의 무위(無爲)개념을 간결하게 설명한다. “무위란 완전한 활동정지, 세상에 미치는 효력의 완벽한 부재가 아니다. 현자의 무위란 효력을 미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고(至高)의 실효성, 절대적인 권력, 막대한 힘이 된다. 자연과 우주와 세상의 움직임과 하나가 되는 힘이다.” (83쪽)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이란 개념은 따라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자연과 우주와 하나가 되어 막강한 세력을 얻어내는 지고지순의 경지라는 것이다. 이런 이치를 가장 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이른바 ‘노자삼보(老子三寶)’다. “나에게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서 지키고 보존한다. 자애로움과 검약함, 세상을 위해 나서지 않음이다.” (<도덕경> 67장) 힐렐은 유대사상의 초석(礎石)을 놓은 사람 가운데 하나다. 어느 날 힐렐에게 <토라>의 의미를 아주 간단하게 보여주기를 요구하는 도발적인 인물이 찾아온다. 힐렐이 말한다. “성서 전체를 한 문장으로 말해달라고?! 문제없네. 사람들이 네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을 네 이웃에게 하지 말라. 이것이 <토라> 전체의 말이네. 나머지는 모두 해설이야. 이제 가서 공부하게나...” (90쪽) 야훼(YHWH)의 계시를 받아 모세가 기록했다고 전해지는 <토라>. 모세 5경이나 유대의 율법 혹은 히브리 성서 전체를 아우르는 의미의 <토라>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 힐렐. 그의 생각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내가 바라지 않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말라.” 그렇다. 공자가 자공(子貢)에게 준 가르침과 똑 닮았다. 동양과 서양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지 않다. 체계적인 도보자들, 자유로운 산보자들 드루아는 어느새 우리를 서양의 근대로 인도한다. 13세기 말 근대의 여명(黎明)에서 시작하여 19세기 초까지 섭렵한다. 그 시기에 우리는 오컴의 윌리엄 수도사, 데카르트, 디드로, 루소, 칸트와 헤겔을 만난다. 그 가운데 데카르트와 디드로를 돌아보자. 드루아에 따르면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는 걷기가 네 번 나온다고 한다. 그 중 하나.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빙빙 돌며 헤매지 말아야 하고, 제자리에 머물러서는 더욱 안 되며, 이쪽이든 저쪽이든 언제나 같은 쪽으로 최대한 똑바로 걸어야 하고, 사소한 이유로 길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 이 방법으로는 가고자 하는 곳에 가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어딘가 끝에는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이 필시 숲속 한가운데보다는 나을 것이다.” (133쪽) 길을 잃으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걷다 보면 아까 왔던 길이 나타나고, 결국에는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 더욱 당황해하고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절망하기 쉽다.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데카르트는 간명하게 제시한다.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면 헤매거나 맴돌거나 멈추지 말고 한 방향으로 똑바로 걸으라는 것이다. 핵심은 계속 걷는 것이다. “말더듬이보다 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절름발이보다 더 걷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135쪽) 디드로가 남긴 기묘한 말이다. 각자의 결핍과 장애가 더 멀리 나아가게 하는 조건이자 동인(動因)이라는 해석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불완전하기에, 혹은 살아가면서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에 우리는 내적인 추진력과 동력을 얻어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드루아는 이것을 훨씬 명쾌하고 아름답게 정리한다. “절름발이는 똑바로 걷는 사람보다 훨씬 유쾌하고 발랄하며 음악적이다. 절름발이들이 걷기 좋아하는 것은 그들이 춤을 추기 때문이다. 말더듬이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것은 그들이 노래하기 때문이다.” (138쪽) 현대의 신들린 사람들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 근대대학으로 촉발된 정신혁명을 거치면서 현대는 본연의 양상을 갖춘다. 그 시간대를 살아간 대표적인 철학자로 드루아는 헝가리의 쾨뢰시 초머 샨도르, 마르크스, 소로, 키르케고르, 니체와 비트겐슈타인을 거명한다. 그중 마르크스와 니체를 보자. 65세에 런던의 집무실 소파에서 앉은 채로 죽은 마르크스가 규칙적으로 실천한 유일한 신체활동은 걷기였다고 한다. 헤겔은 정신의 걸음, 즉 개념의 변증법을 믿었지만, 마르크스는 다리로 걷는 변증법이야말로 완벽하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념이 세상을 걷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이념을 걷게 한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한다. “문제는 인류가 걷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필요와 강제된 노동의 지배를 뛰어넘어 인간은 자신을 재창조하고 어디로 갈지 생각해야 한다. 세상의 톱니바퀴에 낀 채 외부로부터 조종당하기를 멈추고 홀로 서서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174-175쪽) 최고의 생각은 걸으면서 떠올랐고, 걸어서 떨치지 못할 무거운 생각은 없다고 키르케고르는 말했다. 하지만 니체만큼 걷기에 많은 시간과 노력과 중요성을 부여한 철학자는 없었다고 드루아는 말한다. 생각하고 글 쓰고 제대로 사는 동안 니체는 걷고 또 걸었다는 것이다. “야외에서 몸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가운데 구상(構想)되지 않은 어떤 생각도 믿지 마라. 근육이 춤추는 가운데 구상되지 않은 어떤 생각도 믿지 마라. 누구나 발로 글을 쓴다. 누구든 걸음걸이를 보면 그가 자기 길을 찾았는지 알 수 있다. 목표에 가까이 다다른 사람은 더는 걷는 게 아니라, 춤을 춘다.” (187-189쪽)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니체의 관심대상은 부동의 존재가 아니라 생성하고 변화하는 것이다. 니체는 현실의 흐름을 응시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물과 개인, 형태와 순간을 중시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생겨나서 변화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순환을 거듭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운동, 흐름 그리고 이행(移行) 외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글을 마치면서 1511년에 완성된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중앙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자리한다. 걸으면서 플라톤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그것은 인간의 성찰이 하늘과 천체, 다시 말하자면 변함없이 고정된 영원한 것과 영원성을 향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상을 본다. 사변적인 것보다 감각세계의 경험적인 사실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스승과 제자의 이런 차이가 훗날 변증법으로 이어져 서양철학과 과학의 근간이 된다. “철학적 사유는 추락의 시작, 균형 잡기, 다시 불안정, 다시 안정, 또다시 불안정, 또다시 안정... 이렇게 무한히 이어진다. 철학에서든 과학에서든 서양 역사에서 진보는 언제나 하나의 확신에서 문제 삼기로, 두 번째 확신과 만회(挽回)에서 새로운 문제 삼기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형태의 걷기를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110쪽) 근대이후 500년 넘도록 유지돼온 선진서양 후진동양의 도식은 이런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한 바 크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쉬지 않고 걸었다. 과거에 터를 두고 자양분을 얻으면서 그들은 앞을 보며 걷고 걷는다. 따라서 걷는 것과 인간역사 사이에는 견고하고 항구적인 결합관계가 존재한다. 드루아의 결론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인류가 더 걷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멈출 것이다. 시간, 공간, 역사, 말과 생각도. 인간의 걷기가 점차 소멸(消滅)하는 것은 모든 측면에서 인류의 소멸이 될 것이다. 덜 걷는 인류는 덜 생각한다. 한 걸음은 미미(微微)하지만 길은 무한하다. 우리의 걷기는 언젠가 끝나지만, 걷기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208-2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