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서상국의 시인의 저녁

김규종 서상국의 시인의 저녁

18시 15분

누구나인문학

11월 18일 책 <일본산고>

<토지>의 작가 박경리, 일본을 해부하다! <일본산고>, 박경리 지음, 마로니에 북스, 2019. 생각하면 할수록 일본은 알다가도 모를 나라다. 임진왜란(1592)과 경술국치(1910)로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준 나라. 위로부터 시작한 메이지 유신(1868)으로 아시아 최초로 근대화를 이룩한 나라. 28명의 노벨상 수상자(평화상 1인, 문학상 2인, 과학상 25인)를 보유함으로써 세계 7위에 오른 나라. 국민총생산 세계 3위의 나라. <일본서기>(720)에 기초하여 '임나일본부설'을 줄기차게 주장한 나라. 쓰시마에 근거지를 둔 왜구의 준동으로 고려와 조선은 물론 명나라에도 큰 피해를 준 나라. 미야자키 하야오와 신카이 마코토 같은 만화영화 감독을 가진 나라. 세계에서 해양면적이 가장 넓은 나라. 시민사회단체의 힘이 지독할 정도로 미미하고 허약한 나라. 이런 식으로 해보면 몇 페이지는 금방 넘어갈 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일본의 본질이나 속살, 그들의 이면과 역사적 맥락을 잘 알지 못한다. 마치 가까운 이웃 사람들의 내면이나 일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토지>(1969-1994)의 작가 박경리가 쓴 일본 관련 글을 모아 펴낸 <일본산고>는 적잖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황도주의와 왕실미화 중국은 오래전부터 '천자'라는 이름의 통치자를 섬겼다. 하늘의 아들이란 뜻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천자 대신 '천황'이란 호칭을 쓴다. 지상을 다스리는 천자가 아니라, 하늘을 다스리는 천황이 지배하는 나라. 천자는 하늘로부터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받았고, 그것은 민의로 표출된다. 하지만 천황의 정통성은 혈통으로 확립된다. 중국의 진나라와 한나라의 멸망, 당나라와 명나라의 멸망 배후에는 민중의 반란이 있다. 그것은 백성의 생각, 즉 민의와 여론을 얻지 못한 왕조는 멸망의 길을 걸었다는 뜻이다. 반면 일본의 천황은 정당성을 부여받는 존재가 아니라, 정당성을 부여하는 존재다. 따라서 일본의 권력을 장악하려면 민의가 아니라, 천황을 수중에 넣으면 된다. 이런 맥락에서 박경리는 2차 대전의 비극을 황도주의에서 포착한다. "씨가 마르게 사내들이 죽어간 제2차 세계대전, 일본의 악몽은 사람이 현인신(現人神)으로 존재하는 거짓된 황도주의(皇道主義) 때문이었다. 왕권확립을 위한 왕실미화는 필수적이며, 날조와 삭제, 표절은 불가피한 일이다. 신화는 어디서든 세월에 따라 삭제되고 날조하고 표절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30-34) 작가는 일본의 두 가지 기둥, 즉 천조(天祖)의 상속권 주장인 만세일계와 현인신으로 왕을 치장한 신도를 제시한다. 천황 집안이 하나의 계통으로 태초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는 주장이 만세일계다. 일왕은 살아있는 신이라는 주장이 현인신으로 표현되는 신도(황도)사상이다. 두 가지 거짓 기둥이 일본 국민을 가두어왔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 결과 일본인에게는 창조의 활력이 위축되었다고 작가는 지적한다. 한국의 전통이 되어버린 민주화운동은 4.19에서 발원하여 1980년 광주항쟁과 1987년 평화대행진, 2016년-2017년 촛불시위로 이어진다. 반면에 일본에는 대규모 시위문화나 전통 자체가 아예 없다. 군왕은 배요, 백성은 물이라는 '군주민수(君舟民水)' 사상이 일본에는 부재한다. 체념과 마조히즘 일본인의 정서를 말하면서 박경리는 우수와 허무주의를 거명한다. 그는 일본인이 가지고 있는 정서의 근사치를 '고목에 앉은 겨울 까마귀'로 규정한다. 시간 배경은 다르지만, 일본의 대표적인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는 이렇게 노래했다. "마른 가지에 까마귀 앉아 있다. 가을 저물녘." 이파리 진 나뭇가지에 홀로 앉아 있는 저물 무렵의 까마귀. 처연함을 넘어 허무로 경도되는 시인의 내면세계가 손에 잡힐 듯하다. "내 마음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더니 동지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미당 서정주의 <동천(冬天)> 전문이다. 어떤 따사롭고 정감 깊은 시적 화자의 눈길이 느껴진다. 이런 정도의 차이가 아닐지 모르겠다. 박경리는 사무라이들이 벌이는 '절복(하라키리)'을 잔인무도한 의식이라 단언한다. "절복은 일본 정신을 의식화한 것이다. 생선 배 갈라 내장 꺼내는 것같이, 복부이기 때문에 절명에는 시간이 걸리고, '가이샤쿠(介錯)'라 해서 칼을 들고 기다리다가 배 가른 사람의 목을 쳐주는데, 두 번 죽음이다. 이런 죽음의 본질에는 체념과 마조히즘이 있다." (50-51) 자살자에게 자신의 고통을 끝까지 바라보게 하고,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도록 하는 절복에서 박경리는 휴머니티의 결여를 읽는다. 이런 맥락에서 박경리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지옥변>에 나타난 일본 주류문학의 흐름을 괴기와 탐미로 이해한다. 일본 문학과 문화의 본질 일본 문학과 문화는 주제가 약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기능과 세기(細技)가 우수하지만 남의 본과 틀을 훔치거나 얻어서 갈고 닦았기 때문에, 문화에서도 일본은 고아 같은 존재라고 작가는 단언한다. 이런 생각에 기초하여 박경리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옛날 일본은 아시아의 고도(孤島)였다. 기능적이고 공리적인 특성은 차라리 서쪽에 가깝다. 일본은 서쪽을 등에 업고 동쪽을 배신한 유일한 나라다." (77) 작가는 군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희대의 참극인 '남경학살'의 배후에 자리한 허무주의와 사디즘을 포착한다. 진실을 외면한 채 만세일계와 신도의 체제를 변호하는 일본 문학과 문화는 그 자체로 출구가 막혀있다고 박경리는 진단한다. "일본 문학의 탐미주의, 예술지상주의는 선함과 진실함도 결여하고 있으며,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농후하다. 일본 문학의 전통은 탐미주의와 쾌락주의요, 일본문화의 특징은 에로티시즘, 그로테스크, 난센스다. 일본 군국주의는 에로티시즘과 그로테스크, 난센스 그리고 황도주의의 결합이다." (102-128) 문화는 근본적으로 삶을 위한 틀인데, 칼의 문화를 말하고 죽음을 미화하는 일본 전통은 문화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일본군이 백주에 저지른 처참한 남경학살극은 죽음을 미화하는 칼의 문화가 빚어낸 참극이라는 얘기다. 일본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연출한 <우나기>(1997)를 보면서 전율한 기억이 있다.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아내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사내에게서 번뜩였던 놀라운 살의와 희번덕거리는 광기는 형언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런 장면이 가능한 것은, 어쩌면 '칼'의 문화를 자처하고, 그것을 찬양해온 일본문화가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쪽에는 지극히 선량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극악무도한 인간들이 악귀처럼 떠도는 지옥도가 있다. 이런 현저한 대비와 대조를 원경과 근경으로 삼아 인간의 내면을 천착하는 것이 일본 문학이나 영화의 속성 가운데 하나일까. <바람의 검 신선조>(2003)에 그려진 눈발 속에 뿌려진 선홍색 핏빛 같은 대목 같은 것 말이다. 박경리의 지적처럼 일본의 춤과 노래에는 활력이 없다. 그러나 일본의 노와 가부키는 마이어홀드의 연극에 영향을 미쳤고, 일본의 회화는 프랑스 인상파에 자극제로 작용했다. 오늘날 한류가 일본을 포함한 세계전역으로 수출되는 상황에서 불과 20년 전에 <토지>의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글을 읽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 <일본산고>, 박경리 지음, 마로니에 북스,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