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인문학
2월 3일 책 <수피우화>

여행가면서 책은 왜 가져가니?! <수피우화>
<수피우화>, 김남용 엮음, 도서출판 화담, 2006.
출판계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 여름 휴가철이 불황기가 아니라 호황기라는 것! 까닭이 뭘까. 여행객들이 가방에 책을 챙겨가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대체 왜들 그러는 건지, 궁금하다. 놀고 쉬고 즐기러 떠나는 여행길에 책이 웬 말인가. 지식과 지혜를 열망하는 한국인들의 근면한 삶의 양상이라 생각해두자. 나는 <수피우화> 한 권만 추천한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양자의 호환성이 이토록 잘 작동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유쾌하고 흥겨운 여행지에서 두툼하고 난해하며 지루한 서책을 읽는 것은 고역이다. 더욱이 모기와 소음과 더위의 삼중고와 싸워야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여행지의 책은 단출하고 간명하며 재미있어야 한다.
<수피우화>의 부제는 ‘깨달음을 나르는 수레’다. 유대교의 랍비나 불교의 고승처럼 이슬람의 수피는 도저한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수피Sufi’는 양털을 뜻하는 ‘수프Suf’에서 나왔다고 전한다. 수피들이 양털로 짠 외투를 입고 청빈한 생활을 했던 것에서 어원이 만들어진 모양이다. 어쨌든 <수피우화>는 그들의 지혜를 압축한 서책이다.
<수피우화>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양털 가죽을 걸치고 사막을 걸었던 가난한 사람, 그가 수피입니다. 수피가 되기 위해 그는 정착지에서 떠나 끊임없이 여행하고, 속세에서 벗어나 영혼의 해방을 노래했습니다. 그는 예언자이며, 지도자이고, 시인입니다. 하지만 수피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수피는 오직 사랑의 몸짓으로 말합니다. 수피의 사랑은 일곱 가지 신비체험을 바탕으로 실천됩니다.”
<수피우화>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수피의 일곱 가지 신비체험의 실체는 무엇인가. ‘감사하라. 믿으라. 여행하라. 돌아보라. 참으라. 즐겨라. 해방하라.’ 서책은 이런 명제에 따라 일곱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피우화>가 읽기 편한 까닭은 각각의 장에 나오는 이야기가 매우 짧고 알기 쉬운 일화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서책의 짜임새를 살펴보자. 제1장 ‘그대 자신에게 감사하라’, 제2장 ‘오늘의 그대를 믿어라’, 제3장 ‘끊임없이 여행하라’, 제4장 ‘그대 자신을 돌아보라’, 제5장 ‘한 번만 더 참아라’, 제6장 ‘인생을 즐겨라’, 제7장 ‘영혼을 해방하라.’ 이런 구성을 보면 <수피우화>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맞닥뜨리는 현실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음이 확연해진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묶은 불교 초기경전 <수타 니파타>가 그러하듯 <수피우화>도 대개 문답 형식을 취한다. 형식은 비슷하되 길이는 후자가 현저하게 짧다. 그렇다고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제목이 알려주듯 서책은 우화의 틀로 간명하고 직선적으로 사태의 본질을 파고든다. 몇몇 본보기를 보자.
왜 바깥에서 진리를 찾는가
“그대가 정녕 똑똑하다면 생각해보라. 무엇 때문에 바깥에서 진리를 찾는단 말인가. 거기서 진리를 잃어버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수피우화>, 211쪽)
성스러운 여성이자 수피로 이름 높았던 라비아의 말이다. 바늘을 잃어버린 라비아가 오두막 바깥에서 바늘을 찾는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라비아를 도와 바늘을 찾기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 어두워졌는데도 바늘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그녀가 바늘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묻는다. 라비아는 집안에서 잃어버렸다고 대답한다. 깜짝 놀라며 황당해하는 사람들.
그녀는 집안보다 바깥이 더 밝기 때문에 밖에서 바늘을 찾고 있다고 응수한다. 그녀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을 듣고 그녀를 비아냥거리는 사람에게 라비아는 말한다.
“그대 자신을 돌아보라. 그대 또한 밖에서만 찾고 있지 않았던가. 그대가 찾고 있는 그것은 사실 안에서 잃어버린 것이 아니더냐. 그대는 진리와 구원을 찾고 있었다. 그것은 안에서 잃어버린 게 아니더냐. 그런데 그대는 그걸 바깥에서만 찾지 않았더냐. 바깥이 밝으니까, 밖은 쉽게 볼 수 있으니까, 바깥에서 찾고 있었던 게 아니더냐.” (210-211쪽)
이런 식이다. 우리가 구하고 있는 궁극의 진리와 구원 혹은 가치는 바깥에 있지 아니하고, 우리 내부에 있음을 설파하는 것이다. 아주 명쾌한 비유를 들면서.
항상 그러하지 아니 하니라
전쟁의 승패와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왕에게 수피가 반지에 글귀를 새겨 바친다. 거기 새겨진 글귀가 ‘항상 그러하지 아니 하니라.’ (132쪽)
전투 전날 밤 왕은 걱정으로 잠을 잘 수 없다. 그러다 반지의 글귀를 떠올리고 난 다음 깊고 편한 잠을 이룬다. 다음날 그는 대승을 거둔다. 자신감과 뿌듯함으로 오만해졌던 왕은 반지를 보다가 등골이 오싹해진다. ‘항상 그러하지 아니 하니라!’ 마음을 가다듬은 왕은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야습(夜襲)을 시도한 적을 궤멸시켜 최종적인 승리에 이를 수 있었다.
‘항상 그러하지 아니 하니라!’ 낯익은 말이다. 다윗과 솔로몬 이야기에도 나온다. 승리와 패배를 모두 극복하려 했던 다윗에게 솔로몬이 반지 세공사에게 알려준 구절이 “그것 또한 지나가리라!” 아니었는가. 열반에 들면서 부처는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는 말을 남긴다. 그것이 솔로몬의 말이든 부처의 말씀이든 수피의 가르침이든 본질은 동일하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환경은 나날이 변한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될 수 있고, 오늘의 승리가 내일의 패배로 직결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과 여기’에 함몰되어 아주 가까운 미래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지나친 슬픔과 과도한 행복에 사로잡혀 출구를 찾지 못하고 허우적거린다. 변화무쌍한 삶의 본질을 일깨우는 명편(名篇)이다.
쓸모없으면 오래 살 수 있다?!
수피가 제자들을 데리고 목수가 한창 벌목하고 있던 숲속을 지나간다. 수피 일행은 아름드리로 자라난 크고 아름다운 나무 아래서 쉬어가기로 한다. 그 나무는 숲에서 가장 크고 멋진 나무였다. 수피는 그 나무를 여태 베어내지 않은 까닭을 목수에게 묻는다.
“그 나무는 쓸모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것으로는 가구도 만들 수 없고, 땔감으로도 쓸 수 없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에 나무를 자르지 않은 것입니다.” (263쪽)
대답을 듣고 난 수피가 제자들에게 기막힌 가르침을 준다.
“자네들도 이 나무한테 배우게. 이것처럼 쓸모가 없게 되면 누구도 그대들을 자르지 못할 것이야.” (같은 곳)
이 대목 역시 익숙하지 않은가. <장자> ‘내편’ [인간세]에 나오는 ‘무용지용’의 장면을 쏙 빼닮았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천수(天壽)를 누리는 사당나무를 보고 대목인 장석이 제자에게 일갈했던 쓸모없음의 쓸모! 우리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을 듣고 성장한다. 하지만 쓸모없는 편이 더 나을 때도 적잖다. 세상은 둥글지만 또 모나기도 하니까.
여행할 때는 여행만 하시라!
청년시절 나의 여행 배낭에도 몇 권의 책이 동반했다. 언제나 그랬다. 하지만 가져간 책을 끝까지 읽은 기억은 없다. 단연코 없다! 왜냐고?! 노는 게 훨씬 더 신나고 재미났으니까. 딱딱하고 어렵고 지겨운 책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시기가 여행 다닐 때 아닌가. 그런데 왜 그렇게 무거운 책을 끼고 돌아다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미친 짓 아닌가!
요즘에 나는 여행을 갈라치면 그냥 간다. 아무런 읽을거리도 가져가지 않는다. 필기도구도 필요 없다. 스마트폰에 무궁무진한 읽을거리와 필기도구가 내장되어 있으므로. 그 정도면 충분하다. 머리와 가슴을 비우고 재충전하는 요긴한 시간대가 여행하는 시기다. 그런 때만이라도 서책과 번다한 상념에서 벗어나는 편이 외려 낫지 않을까.
그럼에도 아쉽고 섭섭한 분이 있다면 <수피우화>를 가져가시라. 길어야 두세 쪽에 담긴 재미있고 유쾌한 사건과 교훈과 경구가 넘쳐나는 책이기에. 모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될 때도 <수피우화>는 요긴할 것이다. 흥미롭고 간명한 이야기로 넘쳐나는 <수피우화>가 올여름 여러분의 피서지를 더욱 의미 있고 풍요롭게 할 것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