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인문학
6월 16일 책 <문명과 물질>

<문명과 물질>, 스티븐 사스 지음, 배상규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1.
어느 재료공학과 교수의 문명 이야기
어떤 책을 읽고 나면 경탄과 희열이 찾아오고, 어떤 책을 읽으면 후회가 찾아올 때도 있다. 서책을 고른 주체는 인데, 너무 서두르거나, 깊은 생각 없이 경솔하게 선택하는 수가 있다. 이번에 읽게 된 <문명과 물질>은 절대 가벼운 서책이 아니다. 이공계 교수의 책을 읽을 기회가 별로 없던 나로서는 뜻밖의 선택이었다. 선택의 결과가 궁금하다.
코넬 대학교 재료공학과 교수를 역임한 스티븐 사스의 <문명과 물질: 원제는 문명의 물질 The Substance of Civilization>은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하다. 어떤 분야는 역사학과 문화사가 어떤 곳은 화학과 자연과학이 넘쳐난다. 재료공학 전문가답게 그는 전문적인 내용을 알기 쉽게 풀이한다. 하지만 어렵고 딱딱한 대목도 적잖다.
문명과 문명사를 말할 때 우리는 대개 세계 4대 문명과 초원 문명에서 시작하여 동서양으로 분류하여 접근한다. 하지만 다루는 범위가 워낙 넓어서 그와 같은 접근은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격이다. 사스 교수는 ‘물질’이라는 핵심어 하나로 인류 문명사를 관통하려는 놀라운 기획을 실현한다. 그것이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독자가 판단할 몫이다.
물질과 시대
요즘도 역사 교과서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시대구분 방식 가운데 하나가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같은 표현일 것이다. 이른바 신석기혁명은 농업혁명과 맞물려 도시 문명을 발생시킴으로써 고대문명이 생겨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돌이나 청동기 혹은 철기보다 훨씬 이전에 사용된 불이라는 물질의 중요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석기시대 사람들이 청동기를 쓰는 사람들에게, 청동기 사용자들은 철기 사용자들에게 복속되었음은 자명하다. 그것은 인간이 사용해온 도구나 무기의 재료가 무엇이냐에 따라 생산성과 살상력에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수메르인이 개발한 쟁기의 재료는 처음에는 나무였다가 돌로, 나중에는 구리로 변화한다.
기원전 8000년에서 9000년에 금속을 인지하고 사용하기 시작한 인류가 일찍부터 활용한 금속은 구리였다. 구리가 광석에서 추출하고 제련하기 쉬운 금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리와 관련된 노동을 하던 사람들은 독성물질인 삼산화비소로 인한 심각한 질병을 경험했다고 한다. <일리아드>의 헤파이스토스가 불구인 것은 까닭이 있다.
물질을 정복하는 자가 기술을 정복하고, 기술을 정복하는 자가 세계를 정복한다는 말이 있다. 1979년 일본의 소니에서 개발한 워크맨은 그야말로 기술의 신기원이었다. 청춘들의 꿈 가운데 하나가 자신만의 워크맨을 가지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1980-90년대 일본은 그야말로 미국을 능가할 지경의 놀라운 기술 대국을 실현한 나라였다.
동양과 서양
콜럼버스 이후 지리상의 발견과 계몽주의, 산업혁명과 정치혁명, 근대국가 성립과 제국주의를 거치면서 ‘선진서양 후진동양’이라는 개념이 일반화한다. 500년 정도의 시간 속에서 이런 도식이 만들어지고, 오리엔탈리즘 같은 파괴적인 용어도 생겨난다. 그러나 오늘의 서양을 가능하게 한 근본적인 동력과 원천은 동양에 있었다.
피보나치의 <산반서> (1202) 이후 서양에 널리 소개-도입되기 시작한 아라비아 숫자의 원천은 인도였다.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는 ‘공’ 혹은 ‘영’ 또는 ‘무’의 개념을 의미하는 ‘슈냐’를 찾아낸 사람들은 우파니샤드 철학에 기초한 힌두인이었다. 그들의 숫자 표기법이 아라비아를 거쳐 이베리아반도를 지나 유럽에 전파된 것이다.
바그다드에 건립된 세계 최대규모의 도서관 ‘바이트 알히크마 (지혜의 전당)’에 소장된 아랍어 번역본은 유럽인들이 접할 수 있던 고대 학자들의 학문적 정수였다. 여기에 중국인들이 발명한 위대한 물품인 종이와 인쇄술, 화약과 나침반, 대포 등이 유럽에 도입됨으로써 유럽은 암흑시대를 벗어나 이른바 근대를 향한 장정을 시작한 것이다.
“동양의 발명품이 유럽에 도착했을 때 서구인은 그 진가를 재빨리 인식하고 발명품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중국인은 서구세계가 개선한 기술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수십 년 전에야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그마저도 거부감이 상당히 심했다.” (218)
오랜 세월 중국인들은 외부세계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고, 그것이 기술개발에 뒤처지는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어떤 대상이나 현실을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와 태도의 차이가 근대 이후 오늘날까지 중국과 유럽(미국)을 나누는 척도일지 모르겠다.
타이타닉호와 도리아호
다음과 같은 주관식 문제를 제시하면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인가?
“1912년에 침몰한 영국 여객선 타이타닉호와 1956년에 침몰한 이탈리아 여객선 안드레아 도리아 호에서 유품을 건져 올려 서로 비교한다고 가정해보라. 두 여객선에서 찾아낸 유품 사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무엇일까?” (261)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얼마 전 뉴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 플라스틱이다. 수심 1만 540미터로 세계에서 세 번째 깊은 바닷속에서 플라스틱 쓰레기가 발견되었다.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가 어떻게 그토록 깊은 바닷속까지 도달하는지는 연구 대상이다. 인류가 만들어낸 합성재료 가운데 하나인 플라스틱이 지구를 오염시키고 있다.
서책의 지은이 사스 교수에 따르면, 20세기 이전에 인류는 완전한 합성재료 제작 방법을 몰랐다고 한다. 1912년에는 극소수의 합성재료가 제작되지만, 1956년이 되면 플라스틱 라디오, 비옷, 전선 피복 같은 물건이 아주 흔해진다. 그런 재료로 만들어진 물건들이 마구잡이로 버려져 해양 심해저(深海低)까지 도달한다는 놀라운 이야기다.
글을 마치면서
공과대학 소속인 재료공학과가 대체 무엇을 연구하고 만들어내는 학과인지 궁금한 적이 많았다. 이번에 <문명과 물질>을 독서하고 나니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다. 인문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사스 교수는 인문계 문외한 독자들을 위해 최대한 성의를 가지고 서책을 집필했다.
용어가 어려운 경우에는 옮긴이가 괄호 안에 설명을 덧붙여놓았기에 사전을 찾지 않아도 대강의 뜻을 파악할 수 있다. 지은이와 옮긴이의 이런 수고로운 노력 덕분에 미지의 영역에 속했던 재료공학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얻게 되어 흐뭇한 마음이다. 지은이가 많은 노고를 할애한 문화사-문명사 분야에 특별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실리콘에 관한 사스 교수의 견해를 전하면서 글을 맺는다.
“인류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바꾼 컴퓨터는 실리콘이라는 재료의 놀라운 전기적 특성과 그 특성을 기발하게 활용하도록 고안된 방법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산소 원자 4개와 결합하는 실리콘은 점토, 세라믹, 유리 그리고 지구를 구성하는 중요 물질이다. 또한 실리콘은 컴퓨터의 두뇌와 기억장치를 이루는 물질로 변신할 수도 있다.” (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