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인문학
5월 26일 책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오다>, 강명관 지음, 푸른 역사, 2003.
그림과 관련된 해설서가 근자에 상당량 출간된 바 있다. 대부분 유럽의 고전 명화에서 현대 추상회화에 이르는 이른바 서양화를 해설한 서책들이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우리의 전통적인 회화에 관심을 둔 것들이다. 그런데 그림을 폭넓고 깊이 있게 이해하려면 여러 가지 요소들이 부가되어야 한다. 간단히 언급하자면, 화가의 개인사와 시대적인 조류, 즉 화풍, 당대의 사회-문화적인 배경, 즉 재정적인 개인 후원자 혹은 후원집단이나 화상들과의 관계, 정치적인 변고와 그것과 결부된 화가의 친연성 여부, 그림이 필요한 고객들과 화가의 입장 등등.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특히 인상파 이전의 서양화에서 우리가 성서의 전통과 그리스-로마의 신화적인 전통, 폭을 확대하자면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유구한 전통과 그것의 외화형식을 올바르게 포착하지 못한다면, 서양화에 대한 제대로의 감상과 접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요즘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그리스-로마 신화'의 광범한 보급과 다채로운 형식은 (길지 않은 분량의 축약본부터 만화, 나아가 텔레비전용 만화 영화에 이르는 형식) 신화를 이해하는 차원에 머무는 것 아니라, 서양 문화의 커다란 한 축에 다가서는 첫걸음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을 듯싶다.
현직 한문학과 교수가 집필한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오다>는 (이하 <조선>) 우리에게 친숙한 조선의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의 그림을 인문학자의 시선으로 설명-해석하려는 참신한 시도를 담고 있다.
그의 관점을 적시하는 표현은 "그림은 그림 내부의 미학적 장치뿐 아니라, 그것을 산생(産生)한 사회적 문맥에서 읽어낼 때 더 정확한 이해와 감상이 가능하다"는 (27쪽) 것이다. 이런 일례로 필자는 추사의 '세한도'와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들고 있다. 필자는 1974년 '탐구당'에서 영인-출간한 <혜원전신첩>에 수록된 30점의 그림을 위에 언급한 관점에 기초하여 하나하나 해설해 나간다.
<조선>이 의미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비속한 그림을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13쪽) 혜원에게 부여된 어떤 교조화되고 정형화된 이해의 틀을 깨트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단원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풍속화가로 혜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는 조선 시대의 민간 세시풍속을 재미있는 필치로 형상화하였다는 등의 판에 박힌 교과서적인 관점을 <조선>의 저자는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조선>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소제목에서 능히 짐작된다: 과부, 춘정과 유혹, 기방풍경, 절과 여인 등등.
<밀회, 月下情人>이란 제목이 달린 그림에서 우리는 야삼경에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의 시각) 만나 말 못 할 마음으로 애태우는 연인을 본다. 이 그림의 화제 "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달빛 깊은 한밤중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이 알겠지"는 두 남녀의 심사와 형편을 그림만큼이나 온전하게 드러내고 있다.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여인의 두 눈은 정인을 향해 살포시 열려 있고, 남정네의 시선도 여인을 향해 움직일 줄 모르고 고정되어 있다. 한 손에 초롱불을 들고 서 있는 사내는 다른 손으로 무엇인가를 꺼내고 있는데, 필자는 그것을 어떤 정표를 여인에게 주려고 하는 동작으로 설명한다. 무슨 사연이 있어 도회의 깊은 밤중에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이 그림은 "도덕의 지층 아래 완강히 자리 잡은 욕망의 핵을 표현"했다고 (68쪽) 필자는 설명한다.
정인들의 말 못 할 심사야 어느 시대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도 존재하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편벽고루(偏僻固陋)한 주자학의 지배 시기를 살았던 청춘들에게 사회적 억압과 금기의 윤리와 풍속에 대한 정면대결은 불가한 노릇이었겠으나, 끓어오르는 정념의 드러남이야 어찌하겠는가? 혜원의 화필이 노니는 곳은 바로 이렇게 타율적으로 강제된 도덕과 윤리의 세계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간절한 희구의 절절한 지향점이었다고 보인다.
같은 장에서 필자는 <삼각관계: 月下密會> 그림 편에서 매우 교묘한 인간관계를 해설한다. 한밤중에 두 명의 여자와 한 사람의 남정네가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기이한 관계와 자세가 그림의 주요한 내용이다. 필자는 이 그림을 상상하여 "밤에 포교가 기생을 데리고 길을 가다가, 아내 혹은 자신과 관계한 여자를 만나 당혹해하다가 기생을 옆에 두고 여자에게 다정하고 구질구질하게 변명을 늘어놓는다"고 (74-75쪽) 말한다.
과연 그러한가? 나는 조금 의심스럽다. 시간적 배경을 역시 야삼경이라 했을 때 그 시각에 포교의 아내가 얼마나 외부출입이 자유로울 수 있었겠는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초경에 (밤 8시) 인경 종을 33번 치면 관원과 이속(吏屬) 외에는 거리를 나다니지 못하고, 5경이 (새벽 4시) 되어 파루 종이 울리면 통금이 해제된다." (63쪽)
<월하정인>의 두 남녀가 통행금지의 어려움을 뚫고 힘겹게 만나고 있음을 전제한다면, <월하밀회>에서 세 남녀는 각각의 사연을 가지고 만나고 있음이다. 차라리 나는 후자에서 '기생을 따라 오입 나가려는 남편을 추적한 용감한 아내가 길모퉁이에서 아직도 당당한 자신의 봉긋한 젖가슴을 들이밀며 그런 부정한 행위의 중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고 생각해본다.
남자의 알듯 모를듯한 표정과 그들 사이의 대화 결과를 기다리는 기생의 발그스레 상기된 얼굴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전해주는 탓이다. 정인의 심야 출입보다는 아내의 남편 추적이 훨씬 더 절실하고 적나라한 양상이 아니겠는가?
<조선>의 미덕은 그림뿐 아니라, 여러 가지의 자료를 통하여, 이를테면, 한시나 사서, 고문헌 등을 통하여 필자의 자유자재한 그림 이해하기가 유쾌하게 읽힌다는 점에 있다. 게다가 이제는 우리의 기억 너머로 영원히 소진되어 버린 세시풍속과 당대의 성에 대한 시선들이 흐드러지게 논의되고 있는 것 또한 경시할 수 없다.
몇몇 춘화까지 동원되지만, 이 책은 단아함의 풍치를 벗어나고 있지 않으며, 절제의 노력이 역력하다. 그러므로 어쩌면 혜원의 자유분방함과 유장한 탈각의 경지를 좇으려면 한참 더한 단련과 공부가 필요하다고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의 그림에 똑같이 그려진 형상의 해석이 상이하니 이 또한 문제점이다. <봄날: 春意滿園>에서 (57쪽) 화폭 오른쪽에 있는 초가지붕과 거기서 무엇인가 불쑥 솟아오른 것을 필자는 '성적인 연상'으로 기술하는데, 69쪽의 <월야밀회> 하단에 돌출된 동일 형상의 기물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이런 면에는 위에 언급한 '통행금지'에서 드러나 있는 불일치와 협화한다.
이런 단선적인 불일치보다 내가 더 관심이 가는 대목은 설득력 있는 그림 설명이 끝으로 가면서 느닷없이 정지한다는 인상을 준다는 사실이다. 그림에 대한 설명이 멈추면서 필자의 주장이나 상상이 그림을 압도한다는 인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를테면 '양반들의 유흥상'에서 필자는 "조선 시대의 양반이라면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선비의 모습을 상상한다... 하지만 이것은 양반의 모습 중 일부일 뿐이다. 아니 근대를 거쳐오면서 왜곡된 양반의 상일 수 있다. 차라리 혜원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술과 기생과 음악과 어우러진 모습이 양반의 사실성에 더 가깝지 않나 한다"고 (180-181쪽) 썼다.
이런 대담한 주장 혹은 가설을 필자는 내세우고 있지만, 그런 주장을 방증할 수 있는 어떤 정보나 자료도 그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필자는 "흔히 양반이라면 문반을 말하는데 이들은 기방(妓房)에 출입하지 않았다. 조선조의 양반 자제들은 연회에서 노래를 듣고 춤을 보는 것 외에는 마음대로 기방에 출입할 수 없었다"고 (143쪽) 쓴다. 이런 명시적인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림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과 새로운 시선은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그런 장점들이 수용되려면 더욱 정교하고 정확한 관점과 서술, 나아가 여러 가지 풍속사와 결부된 서책들과 정보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해본다. 하지만 서양화 관련 서책들만 횡행하는 사대적인 풍토에서 제 나라 역사와 문화를 그림을 통하여 접근하고자 한 어떤 전문적인 문외한의 노고에 깊은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덧붙임: 이 책은 본래 나의 '독서계획'에는 결석하는 것이었는데, 이번 설에 큰아이의 자발적인 독서목록에서 발췌하였다. 아이는 학교 과제물로 이 책을 스스로 고른 모양인데, 필자의 자세하고도 설득력 있는 그림 설명에 적잖게 놀라고 감동한 모습이었다. 작은 초상화 한 점에서도 여러 쪽의 설명이 가능하다는 나의 말에도 아이는 왠지 모를 열패감에 젖어 있는 듯하여 새삼 먹물의 장광설이 지니는 위력에 감읍한 바 있음을 밝히는 바이다. 하하하: '지혜의 요체가 간결함에 있지만, 더러 그것의 반대 현상이 필요함은 무슨 변고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