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인문학
4월 5일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2014)
동문 부근 중국집에서 간짜장 먹다가 휴대전화 받는다. “오빠, 아버지 돌아가셨어!” 나무젓가락을 짜장 그릇에 박아두고 자리 털고 일어선다. 이럴 수는 없다. “119 구급대에 전화했니? 심폐소생술 해달라고 해라. 큰오빠한테 연락하고. 바로 올라가마!”
음력 2002년 12월 9일 저녁나절 일이다. 아까 오전에 한 시간 넘도록 아버지 씻겨드리고 점심 같이 먹고 내려온 길 아니었던가. 아버지는 언제나 씻기를 싫어하셨다. 그래서 어머니 대신 내가 때밀이 수건으로 아버지 씻어드린 게 몇 시간 전이다. 아버지는 어머니 말은 한사코 아니 들으시지만 내가 드리는 말씀은 잘 들으셨다.
점심 먹고 열차 시각까지 꽤나 시간이 남았는데, 아버지는 출발을 채근하셨다. 창밖에는 눈이 장엄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연신 기침을 하셨다. 욕실의 고온과 거실의 온도 차이로 인한 것이려니 생각했다. 아버지 기침 소리는 아파트 현관을 나서야 비로소 들리지 않았다. 열차 편으로 동대구에 도착한 것이 저녁나절!
현대판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끝내 물을 건너시네. 물에 빠져 가셨으니, 장차 임을 어찌 할꼬. 공무도하 공경도하 수하이사 장내공하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將奈公何.”
진나라 최표의 <고금주>에 기록된 <공무도하가>의 배경 설화는 사뭇 쓸쓸하다. 조선의 나룻배 사공 곽리자고가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저어 가는데, 흰 머리의 미친 사람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호리병을 들고 어지러이 강물을 건너는 것이었다. 그의 아내가 뒤쫓아 소리치며 막았으나, 다다르기 전에 그 사람은 물에 빠져 죽었다.
이에 그의 아내는 공후(箜篌)를 타며 <공무도하> 노래를 지으니, 그 소리가 매우 구슬펐다. 그의 아내는 노래가 끝나자 물에 투신하여 죽었다. 자고가 돌아와 아내 려옥(麗玉)에게 그 광경을 이야기하고 노래를 들려주니, 여옥이 슬퍼하며 공후로 그 소리를 본받아 타니, 듣는 자가 가운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 없었다.
이것은 <공무도하가> 혹은 <공후인>에 대한 일반적인 기록이다. 흰 머리 풀어 헤친 미친 남편이 강을 건너다 죽자 아내가 쫓아와서 노래 부르고 따라 죽었다는 설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이하 - <님아>) 제목부터 고대 설화를 연상시킨다. 그러하되 <님아>는 극적인 요소를 배제한 기록영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부부의 연에 대하여
불가에서는 옷깃 한 번 스치는데 500겁의 인연이 필요하다고 설한다. 부부의 연을 맺는 데 필요한 시간은 7,000겁이다. 부모자식 인연이 8,000겁, 형제자매 인연이 9,000겁, 사제지간 인연이 1만겁인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작다. 하지만 혈연과 깨우침의 인연을 제외하면 이생에서 가장 무겁고 소중한 것이 부부의 연이다.
<님아>가 세간의 화제가 되는 까닭은 여기서 발원한다. 98세 조병만 할아버지와 89세 강계열 할머니의 기나긴 부부지연(夫婦之緣)이 영화의 고갱이기 때문이다. 만난 지 30일이나 50일 혹은 100일이 되면 잔치를 벌이는 청춘세대가 자기네를 돌아보는 계기로 작용하는 영화. 70년이 넘도록 부부의 연을 이어오는 두 분의 이야기.
그들의 삶은 한국인의 평균적 자화상 밖에 있다. 무한경쟁, 성공, 권력, 아파트 평수와 주식, 혹은 노욕으로 빚어지는 일탈! 그들은 일상적 탐욕과 부패 혹은 타락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천지운행과 사시변화(四時變化)에 따라 주어진 시공간을 평안하게 유영하며 살아간다. 봄에는 물장난하고, 여름에는 평상에서 소나기 피해 잠들고, 가을에는 낙엽으로 유희한다. 한겨울 소복하게 내린 눈을 먹고 눈사람 만들며 살아간다.
그래서다. 중환자실로 이송된 남편의 회복이 아니라 석 달만 더 살아달라는 할머니의 소망이 명치끝을 찌르는 아픔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돌이킬 수 없음을 직관으로 깨달은 늙은 아낙의 소망이 절절한 것은 그래서다. 황혼이혼이 늘어가고, 고독사하는 노인과 자살하는 할아버지가 급증하는 세태의 한 줄기 빛이 <님아>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님아>에서 설득력은 가족들의 불화에 기인한다. 화목하기만 하고 다복한 노인들의 일상이 화면을 시종했다면 <님아>는 다양성 영화의 수위를 차지하지 못했을 터다. 그것은 영화의 솔직함과 직선성에 관객이 부여한 훈장 같은 것이다. 빛과 그림자, 봄과 겨울, 낮과 밤, 탄생과 소멸의 양면을 고루 비치는 자의 덕목!
할머니의 89세 생일날. 장성해서 대처로 떠난 아들딸과 손자 손녀들이 횡성 산골 마을로 모여든다. 허다한 촛불을 헤아리기 전에 연기와 더불어 촛불은 사그라진다. 오랜만에 산진해미가 밥상에 오르고 노인들의 표정도 환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맏딸과 장남의 대거리가 질펀하게 터져 나오고, 노인들의 수심과 눈물이 번진다.
서로 상처 내기 쉽고 상처받기 쉬운 게 가족이라지만 오랜만에 모인 잔칫상 언쟁은 무겁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것이 가족인 것을 어이하랴. <님아>에서 그 장면이 빠졌다면 객석은 허전했을 것이다. 어떤 집이고 간에 한두 번은 겪었을 풍경이었기에. 그러하되 노인들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의 원죄는 어찌할 터인가.
할아버지 임종 때가 되어서야 자신들의 무심함과 불효를 반성하는 아들들이지만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키 낮은 의자도, 곰팡이 핀 벽지도 변함없다. 마당에 걸려 노인들의 얼굴과 표정과 일상을 비춰주는 거울을 고쳐 다는 것도 아들들의 몫은 아니었다. 그것이 2014년 한국사회 중년 남성들의 우울한 자화상일 것이다.
천지불인(天地不仁)과 생로병사
“봄이 되면 말이여, 꽃봉오리가 핀다 이거지. 그게 여름이 되면 활짝 피어나고, 가을이 되어 서리 맞으면 영락없이 지거든. 서리 맞으면 그걸로 끝이란 말이지.”
돌이킬 수 없는 자연의 이법(理法)을 설파하는 할아버지 낯빛에 일말의 그늘도 없다. 어쩔 도리 없는 인생사 윤회의 질곡을 감당해야 한다는 표정이다.
노자는 그것을 일컬어 ‘천지불인’이라 했다. “천지는 인하지 않아서 세상 만물을 지푸라기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도덕경> 제5장)
그것이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운명이다. <님아>에서 할아버지보다 먼저 세상 버리는 ‘꼬마’가 본보기다. 반면 ‘공순이’가 얻은 여섯 마리 새끼는 천지불인의 다른 양상이다. 한쪽에 죽음이 있으면, 다른 쪽에는 생명이 있음이다. 일컬어 ‘생로병사’ 아니겠는가! 그 영원한 족쇄로부터 탈주하는 것이 ‘해탈’일 것이고!
<님아>는 태어남과 죽음, 늙어감과 병듦을 포장하지 않는다. 윤색이나 각색을 줄이고 있는 그대로 삶과 죽음의 본령을 전달하려는 의지가 돋보인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시절, 죽은 육 남매의 내복을 늦게나마 구해서 할아버지 저승길 동반자로 삼는 장면에 콧날이 찡했다. 저승에서 대면할 어린것들을 위한 마지막 배려!
할머니의 눈사람, 아버지의 눈사람
서설(瑞雪)이 푸근하게 내린 어느 겨울날 할아버지는 불귀의 객이 된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 할머니 혼자 동그마니 남는다. 할아버지 봉분에 눈사람이 올려져 있다. 어느 겨울엔가 둘이서 만들었던 눈사람이 이제 혼자서 외롭게 서 있다. 어린것들의 내복을 불사르며 할머니는 눈물 바람이다. 설움에 북받친 할머니의 곡이 오래 이어진다.
“아이고, 불쌍해라. 불쌍해서 어쩌누. 할아버지 생각할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저승에서 기다릴 어린것들도 있겠지만, 할머니의 할아버지 걱정은 끊이지 않는다. 입성조차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애 보살피듯 남편 수발했던 할머니. 이제는 그 인연을 놓아야 할 시각. 할아버지 무덤 위에 놓인 눈사람이 녹아내리듯 기나긴 만남의 마지막 작별이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음이다. 거기서 연상되는 눈사람 하나!
음성군 생극면 대지 공원묘지! 아버지 모시고 난 첫 번째 기일에 그곳을 찾았다. 눈이 소담스럽고 하얗게 내린 그 날. 어린 조카아이가 눈사람 만들어 할아버지 봉분 위에 올려놓았다. 차마 그 장면이 잊히지 않아 시 <상실(喪失)>로 쓴 기억이 엊그제처럼 환하다.
아버지 산소에도 눈이 함초롬히 덮여 있다/ 동생의 막내 녀석이 아주 작은 눈사람을/ 할아버지 등 위에 올려놓는다/ 계수의 눈사람에 어머니는 이목구비를 달아 주시고/ 아버지 발치에서는 아우의 담배가/ 가느다란 연기를 허공에 흩뿌리고/ 머리맡에서는 당신의 소주가 눈과/ 하나 되어 대지로 흘러든다 (<상실> 4-5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