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 사기 피해자들에 대한 선 구제 후 회수 방안을 담은 전세사기 특별법이 지난 5월 28일 국회를 통과했지만, 하루 만에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21대 국회 임기가 마무리되면서 자동 폐기됐는데요.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은 22대 국회에서 다시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정부·여당의 반대가 완강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전세 사기 피해자들의 길어지는 고통···5월 22일 현재 대구·경북 554명, 전국 17,060명 피해
국토교통부 자료에 따르면 5월 22일 현재 전세 사기 피해자 등으로 결정된 사람은 전국에 17,060명입니다.
피해가 주로 수도권(61.9%)에 집중돼 있지만 대구에도 352명, 경북 202명의 피해자가 있습니다.
연령별로 보면 피해가 주로 40세 미만 청년층(73.7%)에 집중됐습니다.
2023년 대구문화방송이 집중 취재했던 신탁 전세 사기 피해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대구 북구의 도시형 생활주택 세입자 오 모 씨는 전세 사기로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보증금 1억 원을 잃을 처지가 됐습니다.
신탁회사 소유의 집을 임대인이 자기가 주인이라고 속여 계약하는 바람에 보증금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게 됐습니다.
오 모 씨 전세 사기 피해자(2023년 5월 인터뷰) "(임대인이) 신탁(회사)에 허가받지 않은 사람이었대요. 그래서 계약하신 분들은 전부 다 불법이라는 거예요."
"괴롭고 힘들어 더 이상 살 수가 없습니다. 빚으로만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국민도 아닙니까?"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잃게 된 피해자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데요.
피해자 8명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대구에서도 한 명의 피해자가 지난 5월 1일 세상을 등졌습니다.
38살의 여성이었습니다.
고인은 지난 4월 주택이 경매에 넘어가면서 전세보증금 8,400만 원을 돌려받지 못하게 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고인이 살았던 대구의 한 건물에는 13가구가 입주했고, 13억 원가량의 전세 사기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고인의 유서에는 "괴롭고 힘들어 더 이상 살 수가 없습니다. 빚으로만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국민도 아닙니까? 억울하고 비참합니다. 힘없으면 죽어 나가야만 하나요? 저도 잘 살고 싶었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재앙 수준의 참사가 이어진 가운데 2023년 5월 전세 사기 특별법이 제정됐습니다.
전세 사기 피해자들에게 금융 지원을 확대하고, 정부가 경매와 공매 대행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게 핵심 내용입니다.
하지만 빈틈이 많아 법이 시행되자마자 전체 피해자들을 구제할 수 없다며 제도 보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주로 요구했던 게 선 구제 후 구상 방안 도입, 피해자 인정 요건 완화, 사각지대 피해 주택에 대한 통매입과 주거 안정 방안 마련 등입니다.
5월 28일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던 개정안은 이런 요구를 반영해 피해자들이 빨리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선 구제 후 회수' 방안을 담았습니다.
하지만 국토교통부는 국회 표결 전날인 5월 27일 선 구제 방식을 빼고 피해 주택 경매에 공기업이 참여해 얻은 차익으로 피해자를 지원하는 것을 대안으로 내놨습니다.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은 21대 국회 임기 마지막 날인 29일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거부 이유는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조 원의 주택도시기금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돼, 기금이 부실해질 수 있다는 겁니다.
야당 "전세사기 특별법 재추진"···전망은?
야당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30일 국회에서 열린 정책조정 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것을 두고 "100번째 200번째 거부권도 행사하실 것인가"라고 반문했습니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것 아닌가"라며 "총선 민심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국민 배신행위이자 국회 입법권을 침해하는 반민주적 폭거를 강력하게 규탄한다"라고도 했습니다.
대통령령과 집권 여당이 야당의 입법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면서 "대통령이 남발한 묻지 마 거부권 법안 민주당이 반드시 다시 관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22대 국회에서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수 있습니다.
야당 개정안을 지지한 피해자 단체들은 정부가 개정안보다 후퇴한 대안을 고집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나타냈습니다.
무엇보다 피해자들이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는데도 정부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무기로 내세워 피해자들과 야당이 요구하는 보증금 채권 매입안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점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국회 협상 과정에서도 내놓지 않던 지원 대책을 뒤늦게 발표해 여론 물타기를 시도하는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정부가 LH 매입 방안을 특별법 선 구제 후 회수 방안의 대안이라고 강변해서는 안 된다며, 현재 내놓은 LH 매입 방안은 대체로는 선 구제 후 회수 방안보다 못하면 못 했지, 나은 대안이 아니지만, 개선할 여지가 있는 방안이라는 점에서 향후 특별법 개정 이후에도 지속적인 논의를 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습니다.
정부 대책안과 야당의 특별법 개정안이 양립할 수 없는 방안이 아니라며 각자의 상황에 맞게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다고도 했습니다.
정태운 대구 전세 사기 피해자 모임 대표 "저희가 유형이 너무 다양하고 근저당 금액이나 이제 시세가 너무 다양하다 보니까 그리고 낙찰가율도 너무나도 다양하다 보니까 그러한 피해자들에게 선택지를 줄 수 있는 것으로 가야 한다."
전세 사기 피해자들의 고통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은 꽉 막힌 절망의 벽 안에 갇힌 피해자들에게 숨 쉴 구멍을 만들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책임져야 할 기본권인 국민의 주거 안정이라는 책무를 방기해서 비롯된 세입자들의 고통과 짐을 국가가 나눠서 져달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