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서상국의 시인의 저녁

김규종 서상국의 시인의 저녁

18시 15분

누구나인문학

5월 31일 영화 <인트로덕션>


흑백 조각 그림으로 인생을 찾다


 홍상수 감독의 신작 <인트로덕션>


홍상수의 25번째 영화 <인트로덕션>이 상영되고 있다. <인트로덕션>은 제71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각본상(은곰상)을 받음으로써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와 <도망친 여자>(2020)에 이어 홍상수의 세 번째 은곰상 작품이 되었다. ‘인트로덕션’은 소개, 서문, (새것의) 도입 등을 뜻하는데,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자 영어 제목을 가지게 되었다 한다.

불과 66분의 짧은 상영시간을 가진 영화는 3부로 나뉘어 있다. 흑백으로 처리된 영상은 간결한 대화와 이음매 없이 끊어지는 단상(斷想) 형식을 취한다. 사건의 일관된 흐름도, 인물과 관계의 연속성 역시 대수롭지 않게 그려진다. 하나의 이야기마다 무엇인가 함축적인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면, 그것은 허방다리를 밟는 일이 될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관계와 사건이 어떤 필연성이나 인과율로 직조된다면 우리는 인생의 본질이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삶은 무수한 단편(斷片)으로 짜인 조각 그림 맞추기와 비슷하다.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고 나서 전체의 그림이 틀을 갖추기 전에는 형상이나 의미를 단정하기 어렵다. 영화에서 홍상수가 풀어내고자 한 대목이 그것 아닐까 한다.

첫 번째 이야기: 아버지를 찾아가다

영호가 한의사인 아버지를 찾아간다. 한의사는 무엇인가 깊은 고뇌와 고통으로 괴로운 심경이다. 곤경을 벗어나려는 그는 하느님에게 금전적 보상을 제시하면서 난관을 피해 가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무엇 때문에 저토록 절실하게 두 손을 모으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영호는 입학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처럼 보인다.

영호를 맞이하는 인물은 아버지가 아니라 간호사다. 화들짝 반기는 그녀 얼굴에 웃음이 환하게 번진다.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는 말에 위로를 받는 영호.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온통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린 듯하다. 반백의 머리를 한 사내가 한의원 계단참에서 맛있게 담배를 피운다. 특별한 일도 없어 보이는 그를 한의사가 반갑게 맞이한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영호. 그의 마음에는 한의원까지 같이 온 연인 주원이 있다. 기다리다 못해 담배를 피우러 나간 영호. 거리에는 함박눈이 내린다. 그를 따라 나온 간호사를 느닷없이 안아보는 영호. 언젠가 말했던 ‘사랑해요!’를 되풀이하는 영호. 우리는 그들 사이의 지나간 대화와 관계를 짐작하기 어렵다.

두 번째 이야기: 연인을 찾아가다

주원이 어머니와 함께 베를린 주택가에 도착한다. 그들은 겨울에도 푸르게 자라는 겨우살이를 보고 찬탄한다. 그들의 관심은 주원의 유학과 숙박에 도움을 줄 화가에 쏠려 있다. 어머니는 딸과 대화하면서 줄곧 담배를 피운다. 주원은 어머니와 서먹서먹해 보인다. 이윽고 나타난 화가는 주원에게 이것저것 묻는다. 그녀는 의상학을 공부하려 한다.

학부 전공과 사뭇 다른 의상학 공부를 둘러싼 두 사람의 대화는 겉돌고, 어색한 양상을 보인다. 베를린의 ‘슈프레강’ 근처에 있는 공원을 산책하는 세 사람. 특별한 것도 없는 이야기가 오가는데, 주원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영호가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다. 그의 출현은 인과성은 물론 최소한의 우연성마저 낯설게 여겨지는 횡설수설이다.

보고 싶어서 비행기표를 샀다는 충동적인 행동에 어떤 인과율이 작동하겠는가?! 연인과 걸으면서도 담배를 손에서 놓지 않는 영호. 아버지에게 의지하여 인생 행로를 바꿔보려는 무력한 청년 영호의 구차한 내면이 안쓰럽게 다가온다. 낯선 베를린 거리에서 주원을 안아주는 영호. 그들의 포옹에는 두려움과 외로움 그리고 쓸쓸함에 교차한다.

세 번째 이야기: 어머니를 찾아가다

그곳은 강릉이어도 속초라도 좋다. 동해와 파도가 있는 강원도 횟집. 중년 남녀가 마주 앉아 맥주를 마신다. 여성의 말에서 아들이 거의 다 왔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연극배우에 관한 것이다. 중년남성은 첫 번째 이야기에 나온 유명 배우다. 그들이 어떤 인연으로 동해의 허름한 횟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는지 우리는 모른다.

친구인 정수와 함께 도착한 영호. 그들은 예의 담배를 피운다. 네 사람이 함께하는 술자리와 대화는 흥미롭고 역동적이다. 역시 홍상수 영화에는 술이 들어가야 하나 보다. 문제는 영호가 거절했던 키스 장면을 둘러싼 충돌이다. 연인을 생각해 키스 장면이 들어있는 영화 배역을 끝내 거부한 영호. 사랑도 없이 여자를 안는 행위에 대한 거부감.

<인트로덕션>에서 유심히 들여다본 대목은 여기다. 아무 감정 없이 여자를 안는 것에서 죄책감을 느낀다는 영호. 그것을 격렬하게 반박하며 공격하는 연극배우. 모든 포옹과 사랑에는 분명 그 나름의 의미와 아름다움이 있다고 주장하는 배우. 아마 그의 말은 김민희와 자신을 향해 세상이 쏟아내는 각종 독설에 대한 홍상수의 내면토로 아닐까.

백설과 강물 그리고 바다

모래사장을 거닐던 영호가 어느새 바다로 걸어 들어간다. 하얗게 물거품을 일으키며 파도 치는 겨울 바다가 춤추듯 영호를 감싸고 영호는 점점 더 바다로 들어간다. 그의 흉중에는 아버지와 간호사, 주원과 어머니, 연극배우의 인상화가 겹쳐지고 포개져 있는 것만 같다. 모든 것이 하나로 합해져 드센 파도가 되어 그의 온몸을 후려갈긴다.

추위로 오그라든 영호를 정수가 안아준다. 눈 내리는 한의원 앞에서 간호사를 안아주고, 베를린 거리에서 주원을 안아주던 영호. 그가 이번에는 파도치는 바닷가에서 정수에게 안긴다. 누군가를 안거나 안긴다는 것은 따뜻한 일이다. 위로와 공감을 주고받는 인간의 따사로운 소통방식이 포옹 아닌가. 주객전도 형식의 포옹으로 온기를 느끼는 영호.

갑자기 그의 앞에 죽음을 결심한 여자가 나타난다. 그녀를 위로하며 올려다본 건물 멀리서 어머니가 창가에 서 있다. 자기네를 보는 듯 안 보는 듯 그들은 가늠할 수 없다. 그들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주원과 영호 관계가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인 것과 마찬가지처럼 보인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허공을 맴도는 인연과 관계.

서울의 백설이 베를린 슈프레강으로 이어지고, 다시 동해의 파도와 바다로 연결된다. 하나의 작은 인연이 점차 커지고 확대되어 인생과 세계를 축조한다. 거기에서 작동하는 필연적인 인과율이나 법칙은 없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소멸하기에 저것도 소멸하는 인과 연의 연기법칙은 없다. 그저 우연과 순간의 교차만이 자리할 뿐.

우리처럼 그들도 근심하고 기대하며, 작은 인연에 환하게 기뻐하고 행복해한다. 상대의 마음에 들고자 조마조마하며, 느닷없는 돌발행동으로 기쁨을 주고자 한다. 고요하게 침전된 내면의 분노나 격정을 한순간 폭발시키기도 하고, 슬픔과 절망을 파도에 실어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관계와 사건은 파도치는 바다의 심연처럼 고요하고 침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