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인문학
10월 20일 책 <조선통신사>

* <조선통신사>에서 생각할 몇 가지
1) <조선통신사>는 오랜만에 들어보는 제목인데요, 출간 배경과 전체적인 내용이 궁금하네요!
<조선통신사>의 부제가 많은 것 설명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과 우호의 조선통신사’
1592년 임진왜란과 그 후에 조선이 파견한 통신사의 내력을 곡진하게 전달
2001년 8월 전교조 대구지부가 히로시마 교원노조 방문 -> 서적 집필 의정서 체결
2002년부터 2005년까지 7차례에 이르는 교차 방문과 공동세미나 개최 -> 출간
한국과 일본의 교원노조가 협력하여 만들어낸 최초의 역사적인 성과물
2) <조선통신사>는 조선이 임진왜란에서 승리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를 항왜에서 본다고?!
항왜(抗倭)라는 말 들어보셨나?! 놀라운 어휘 (난생처음) -> 조선에 투항한 일본 병사 항왜
임란에서 조선의 승리 원동력은 이순신 장군의 해상권 장악, 의병 활동, 명나라 지원.
16만의 일본군이 현해탄 건너 부산 공격 -> 그 가운데 1만의 일본 병사가 조선에 귀순
이유: 장기간의 전쟁, 심리적 압박감, 식량부족, 명분 없는 전쟁에 고통받음
항왜는 화승총 제조기술 + 검술과 포술 교육 + 일본군 정보 제공 + 전투 참가
여기서 주목: 일본군에 투항한 조선군을 순왜(順倭) -> 기록 없음 (전란 당사국의 부주의?)
3) 항왜 가운데 오늘날까지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 사야카라고 하는데, 소개를 해달라!
사야카는 임란의 일본군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의 좌선봉장으로 참전
-> 한 번도 싸우지 않은 채 귀순 “명분 없는 전쟁에 본의 아니게 참전 + 인의와 예의의 나라 조선의 백성이 되고자 합니다!” -> 선조가 김해김씨 성을 하사, 이름을 충선으로 지음
사야카는 1570년에 출생하여 22살에 조선에 왔다가 귀순 -> 1600년 진주목사 딸과 혼인
-> 병자호란 때에도 참전하여 공을 세움 -> 1642년 사망 -> 우록동에 녹동서원과 충절관
해마다 1,000여 명의 일본인이 녹동서원 방문 (사야카 연구단체 설립)
4) 사성 김해김씨의 시조인 김충선(사야카)도 끝내 태어난 나라 일본을 잊지 못했다고?!
그가 남긴 한시 <남풍유감>을 낭송해 보리라!
남풍 때때로 불 제 고향 생각하네/ 조상 무덤은 평안한지 일곱 형제는 무사한지/ 구름을 보며 고향 생각하고/ 봄풀을 봐도 고향 생각하는 마음 어느 땐들 없겠는가/ 일가친척은 살아있을까 아니면 세상을 하직했을까/ 고향 산천 그리움 끊일 날 없도다/ 나라엔 불충이요 집에는 불행 불러왔으니/ 세상 제일 큰 죄인 나 말고 또 뉘 있으랴/ 아마 세상에 흉한 팔자는 나뿐인가 하노라.
조선에서는 대단한 충신이지만, 일본에는 대역죄인 아닌가?! 그의 갈등하는 고뇌가 실감
5) 임진왜란이 끝나고 파견된 조선통신사의 의미와 규모 등에 대해 말해달라!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과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뒤로 하고 임란은 종결
->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가 성립되고, 통신사 파견 요청
-> 1607년 선조가 도쿠가와 국서에 회답, 조선인들의 귀국을 위해 ‘회답겸쇄환사’ 파견
-> 1811년 순조 11년까지 모두 12차례에 걸쳐 조선통신사 파견
그 가운데 1682년 숙종 8년에 파견된 제7회 조선통신사를 보면 대강 파악
-> 475명의 문화사절단 -> 서도, 화가, 의사, 곡마단원 및 무관과 악기 연주자까지 포함
-> 지금도 쓰시마 주민 가운데 일부는 조선통신사에게 받은 붓글씨나 그림 보관
6) 조선통신사의 여정과 거리, 일본의 대응과 조선통신사의 종결을 설명한다면?!
한양에서 에도까지, 서울에서 동경까지 2,000킬로미터 (육로 -> 해로 -> 육로) 6-9달 소요
일본에서 총인원 30만 명과 8만 마리의 말을 동원
막부의 권위 고양 + 국내 정치적 안정 도모 -> 쇼군의 극진한 환대
18세기에 막부가 부담한 통신사 접대비용은 100만 냥 정도 (막부의 연간 예산은 78만 냥)
19세기 초에 일본에 존왕양이 사상 보급 -> 1854년 페리 제독의 개항 요구 -> 1858년 일미수호통상조약 -> 명치유신 -> 정한론 대두 -> 1881년에 일본에 신사유람단 파견 (상황 역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