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인문학
12월 14일 영화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에서 생각할 몇 가지 문제
영화를 보기 전에 관객은 어떤 기대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영화를 어떤 목적과 용도로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시간 죽이기, 연인과 함께하기, 무한 상상력 자극과 만족, 통쾌한 일장활극, 깊은 울림과 감동, 정서적 공감, 통렬한 풍자와 해학, 고전의 재해석 등등. 한 마디로 천차만별 각인각색 천양지차 백화제방이다.
<한나 아렌트>(2012)는 <로자 룩셈부르크> (1986), <위대한 계시>(2009)와 함께 마르가레타 폰 트로타 감독의 삼부작 완결편이다. 이들 삼부작은 여성감독의 시선에 포착된 문제적 여성들의 시각과 사유를 전달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각각의 영화는 나름의 주제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 화이부동의 세계를 보여준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폰 트로타가 제기하는 문제를 사유하고 판단하면 그만이다. 그것이 감독이 관객에게 요청하는 본령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집중 조명되었던 1960-1964년에 초점을 맞춘다. 그것은 히틀러의 충직한 하수인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의 재판과 결부된다.
아이히만과 전범재판
1932년 나치당에 가입한 아이히만은 1942년 게슈타포 유대인 과장이 된다. 그는 유대인을 유럽 각지에서 폴란드 수용소로 이송하는 최고 책임자로 500만 유대인을 이송했다고 한다. 1945년 종전 이후 체포됐으나 수용소를 탈출한다. 이탈리아와 시리아를 경유하여 아르헨티나로 도주했다가, 모사드에 체포되어 공개재판 끝에 교수형 당한다.
유대인 출신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뉴요커> 특파원으로 아이히만 재판에 참석할 자격을 얻는다.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아이히만 재판기록을 분석하고 사유한 아렌트는 1963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함에 관한 보고서>를 출간한다. 영화에서 아렌트가 말하는 것처럼 아이히만 재판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과 궤를 함께한다.
한나의 남편 하인리히는 영화 첫머리에서 모사드의 아이히만 납치와 예루살렘 재판의 정당성을 묻는다. 국가 사이의 '범죄인 인도조약'에 어긋나는 모사드 행위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에서 재판이 진행되면 마녀사냥이나 인민재판 형식으로 흐를 가능성을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폰 트로타의 치밀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아이히만의 자기변호
1961년 4월부터 12월까지 예루살렘에서 공개적으로 진행된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의 범죄를 전면 부인한다. 그의 자기변호를 들어보자.
“나는 연속과정에서 일을 접수하여 중계업무를 처리했습니다. 명령을 받고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내가 한 일은 행정절차에 따른 작은 역할이었습니다. 나는 남을 해치는 것엔 관심도 없었습니다. 나는 잘못이 없습니다. 한 사람도 내 손으로 죽이지 않았으니까요. 죽이라고 명령하지도 않았습니다. 내 권한이 아니었으니까요."
유대인의 수용소 이송임무와 양심 사이의 갈등을 묻는 질문에 그는 답한다.
"나는 시키는 것을 그대로 실천한 관리였을 뿐입니다. 월급을 받으면서도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입니다. 공직자의 용기란 조직된 위계질서입니다.”
이런 식으로 아이히만은 모든 죄를 히틀러에게 돌린다. 자신은 지도자가 명령한 것을 충실히 따랐을 뿐이며, 그 결과 역시 최고권한을 가진 히틀러가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로써 그는 하달된 명령을 기계적으로 수행한 자동인형에 지나지 않았음을 스스로 웅변한 셈이다. 그의 행위에는 스스로 생각하는 과정이 결여되었던 것이다.
아렌트가 해석한 아이히만
“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니라,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가운데 있다. 그리고 파시즘의 광기든 무엇이든 우리가 악을 행하도록 계기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멈추게 할 방법은 ‘생각’하는 것뿐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재판정에서 아이히만을 주시하던 아렌트에게 유대인 대량학살 주범은 너무나 평범한 인간으로 다가온다. 수백만 인명을 사지로 몰아넣은 아이히만은 피에 굶주린 악마도 냉혹한 살인마도 아닌 50대 중년남성에 불과했다. 그는 신념에 사로잡힌 특별한 인간도, 나치즘의 이념에 광분한 광신도도 아니었다. 아렌트의 사유는 여기서 비롯한다.
젊은 날 하이데거에게 사유하는 법을 배웠던 아렌트. 그녀에게 "사유란 인간을 모든 동물과 구별하는 유일한 특질"이라고 일깨웠던 하이데거. 존재의 유일무이한 자기증명을 사유에서 찾았던 하이데거. 그에게 매료되었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정신 상태를 사유부재에서 찾아낸다. 이것을 일컬어 '악의 평범함 banality of evil'이라 한다.
"아이히만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아렌트가 도달한 결론이었다. 자신의 행위가 불러올 파국적인 결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인간. 주어진 과업을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실행한 <모던 타임스>의 실제 주인공 아이히만.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히틀러의 명령에 몸을 던진 나치의 충직한 하수인.
아렌트의 유대인 사회와 지도자 비판
아이히만에 대한 공개재판을 비판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아렌트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나치와 히틀러에 순종하고 협력한 유대인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고도로 조직화된 유대인 사회 지도자들이 나치에 소극적으로나마 부역하지 않았다면 600만 유대인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모두가 희대의 살인마 아이히만에 대한 세기의 재판에 열광하고 그의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는 시점에 전혀 다른 문제를 제기한 아렌트.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미증유의 '제노사이드'를 가능하게 한 책임의 일단을 유대인 사회에서 찾은 한나 아렌트. 그녀를 이해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그녀를 외면한다.
베를린에서 시온주의 운동을 같이했던 쿠르트와 영원한 친구로 여겼던 한스까지 아렌트에게 등을 돌린다. 아이히만의 극악무도한 범죄행각을 어떻게 유대인 지도자들의 행적과 비교할 수 있는가?! 자신을 향한 그들의 분노와 절망은 아렌트를 결코 좌절시키지 못한다. 자신의 사유와 신념을 끝까지 관철해나가려는 아렌트.
아렌트의 사유를 한반도에 적용하면
영화를 보면서 고문기술자 이근안과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의 문귀동이 떠올랐다. 명령에 따라서 충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두 인간. 이근안을 거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국가보안법의 희생양이 되었던가?! 김근태 민청련의장도 피하지 못했던 이근안의 마수.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성을 고문도구로 자행한 희대의 악마 문귀동.
하지만 그들은 집에서는 엄격한 아버지이자 자상한 남편 아니었던가?!
경찰관 누구누구로 말할 것 같으면/ 남의 집 처녀를 성고문한 야수와도 같은 치한이기는 했으되/ 자기 집 딸이 어쩌다 하룻밤 늦도록 들어오지 않으면/ 딸아이 교육을 어떻게 시키느냐고 아내에게 나무라는 엄격한 아버지이기도 했도다. (<세상으로 말할 것 같으면>)
김남주 시인의 풍자가 매섭다. 하지만 무비판적이고 기계적인 명령수행은 지금도 되풀이된다.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한 자들은 승진하여 총리와 대법관이 되어 세상을 호령한다. 그들은 최고 권력자와 법의 명령에 충실한 하수인이자 자동인형이다.
반민특위 와해, 4.3항쟁과 무력진압, 6.25와 보도연맹사건, 4.19혁명과 발포, 베트남 파병과 민간인 학살, 인혁당 사건, 광주항쟁과 서울의 봄, 그리고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국가와 권력은 명령을 하달했고, 누군가는 충실하게 명령을 수행했다.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가치와 권리를 억압하는 사회-정치적으로 구조화된 악에 대한 저항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