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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문화방송이 창사 50주년을 맞아
마련한 기획뉴스,
오늘은 두 번째 순서로
지난 19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치 분야에서 대구의 변천사를 돌아봅니다.
이상원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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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2월 28일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이 이승만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궐기한 2.28 민주운동은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일년 뒤 5.16 쿠데타로 등장한 군사정권에
가장 극렬하게 저항한 곳 역시 대구였습니다.
자유당 시절부터 대구는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중심지,
야당의 중심축이었습니다.
◀INT▶ 나학진 이사장/
(사)대구 민주화 기념보존회
"대구의 민심이,대구의 방향이 어디로 가느냐,
그것부터 먼저 물어보고 당론을 정했을 정도로
대구가 그 당시에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야당의,정치흐름의 중심에 섰다는 것입니다"
CG1] 1963년에 실시된 제 5대 대통령 선거 결과
경북에서 박정희 후보의 득표율은 55.6%,
절반을 조금 넘는 정도였습니다.
67년 6대 대선때는 64%,
그리고 71년 제 7대 대선에서는 75.6%로
대선이 거듭될때 마다 10% 포인트 가깝게
득표율이 올랐습니다.
CG끝]
71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의 선전이 이어지자 위기감을 느낀 공화당이 지역 감정에 호소한
선거전략을 밀어부쳤고, 결국 경북에서의
높은 득표율에 힘입어 박정희 후보는 3선에
성공합니다.
박정희 후보와 김대중 후보의 표 차이는
채 100만표도 되지 않았습니다.
71년 대선을 기점으로 '야도' 대구는
'여당의 텃밭'으로 이름표를 바꿔달았고,
대구경북에서 야당 후보가 선거에서 당선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 보다 어렵게
됐습니다.
1996년 제 15대 총선에서
자민련 녹색바람이 불었지만,
어디까지나 무늬만 야당일 뿐이었습니다.
여당 후보는 깃발만 꽂으면 당선되는
정치 지형 속에서 후보들은 유권자는 뒷전인 채
공천을 받는데만 급급하고
이른바 '서울 TK'가 지역 감정의
가장 큰 혜택을 보는 게 왜곡된 정치 구도로
굳어져 버렸습니다.
기형적인 정치 지형이 결국 지역 발전의 후퇴로 이어진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INT▶ 윤순갑 교수/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지역 출신 서울사람들에 의해서 대표되는
지금 이 대표원리는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체감온도가
다르다는 얘기죠.입법과정에도 드러나고
정치과정에도 그대로 투영됨으로써
지역민들의 문제를 대변해야할 사람들이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거듭되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S/U) "이제 지방자치, 지역발전이 정치의
새로운 화두가 되는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지난 50년, 극과 극을 오갔던 대구 경북의
정치 지형이 앞으로는 어떻게 형성돼
나갈 것인지,
무거운 정치적 숙제로 던져져 있습니다.
MBC NEWS 이 상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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