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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대구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저항의 중심지" 2·28 첫 외신 보도는 영국 '더 타임즈'

◀앵커▶
2023년으로 63주년을 맞은 우리나라 첫 민주운동, 2·28에 대해 기획보도를 이어가고 있는데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중요 사실 몇 가지를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구의 2·28은 최초의 민주운동이면서도 오랫동안 다른 민주운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해외 언론에서는 마산 3·15와 4·19 혁명이 일어나기 전 크게 주목하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입으로만 전해지던 당시 외신 보도를 대구mbc가 처음으로 확인했는데요.

취재기자와 관련 소식 살펴보겠습니다.

조재한 기자, 2·28이 일어나고 국내 언론을 통한 보도는 많았습니다만, 외신 보도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것 같은데요?


◀기자▶
지역 언론, 당시는 신문이 대부분이었는데, 지역 신문을 통해 2·28 관련 보도는 많았습니다.

해외에도 보도가 됐다는 증언은 시위 참여자들 사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왔는데요.

증언 가운데는 2·28 직후에 영국 기자가 경북고를 방문해, 인터뷰까지 해 갔다는 구체적인 증언도 있었습니다.

대구mbc 취재진이 직접 확인에 나섰는데요.

당시 라디오 중심의 통신 기록은 사실상 확인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고, 영국 기자가 취재했다는 단서를 근거로, 영국 현지에 인력을 활용해서 1960년 2월부터 5월까지 신문을 일일이 확인했는데요.

확인 과정에서 영국의 유력지 '더 타임즈'에서 보도한 사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앵커▶
영국 '더 타임즈' 라면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유력지인데, 몇 일자로 보도가 됐습니까?


◀기자▶
1960년 2월 28일에 시위가 있었고, 더 타임즈에는 3월 15일 자에 실렸습니다.

그해 윤달로 2월 29일까지 있었으니까, 16일 만에 보도가 된 겁니다.

◀앵커▶
3월 15일이면, 4·19가 일어나기 한참 전이네요?

◀기자▶
그렇습니다. 취재진이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당일 신문 원본을 확보했는데, 기사 작성은 3월 14일 자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3월 15일 마산의거나 4·19 혁명이 일어나기 전입니다.

그만큼 대구 2·28에 주목하고 큰 의미를 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앵커▶
기사에는 어떤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까?


◀기자▶
당시 기사는 3월 15일 선거를 앞둔 우리나라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데요.

여야가 마지막 유세전을 벌이는가 하면, 거리에는 경찰뿐 아니라 군인까지 투입돼 질서 유지를 하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2·28과 관련해서는 야당 장면 후보의 연설회가 있는 일요일 등교 결정에 거부하면서 1,200명의 학생이 참가해 200명 이상 체포됐고, 부유층과 정부 관리 자녀들이 많이 다니는 최고의 고등학교 재학생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고도 썼습니다.

기사를 보면, 맨 처음 시작할 때, 대구가 일제 때부터 이미 저항의 중심지였고, 4년 전 야당 후보의 높은 득표율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사의 마무리도 흥미롭습니다.

대구가 독립의 전통을 가지고 있고, 자유당 주도권에 제동을 거는, 저항의 역사를 기록하고 싶어 한다고 마무리했습니다.

◀앵커▶
대구를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이어져온 저항의 중심지로 묘사했는데, 기사를 작성한 기자도 확인했다고요?

◀기자▶
요즘은 기사에 취재기자가 누구인지 나와 있지 않습니까?

바이라인이라고 하는데, 당시에는 이런 바이라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추가 취재를 해보니, 당시 '더 타임즈'에서 한국을 취재하던 특파원은 '찰스 하그로브' 기자란 점을 확인했습니다.

찰스 하그로브 기자는 1951년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란다는 것보다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를 기대하는 편이 좋다'는 기사를 쓰며 한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승만 독재 정권을 겨냥했던 기자가 한국의 첫 민주운동 2·28을 유력지 '더 타임즈'를 통해 전 세계에 알린 겁니다.

이 기사와 관련해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채장수 교수의 말 들어보겠습니다.


◀채장수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상당히 공이 든 기사다. 분량도 그렇고. 청년 학생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2.28 상징되는, 거기에 대한 상당한 동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외신을 보면, 4·19가 일어나기 전 해외에서는 이미 대구의 오래된 저항의 중심지였다며 민주주의의 희망을 찾으며 2·28에 주목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2·28 민주운동 기념사업회는 2월 21일부터 대구문예회관에서 63주년 특별 기획 사진전을 여는데요.

방금 말씀드린 '더 타임즈' 원본도 대구mbc에서 기증해서 처음으로 공개됩니다.


◀앵커▶
2·28 첫 외신을 살펴봤는데, 이번에는 결의문 관련 내용도 살펴보죠.

2·28 결의문은 굉장히 장엄한 결기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기자▶
그렇습니다.

일부분만 보면, '백만학도여 피가 있거든 서슴지 말고 있어서라' 거나 '피 끓는 학도로서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려 한다.'는 등 결의에 찬 내용입니다.

◀앵커▶
그런데, 이 결의문을 쓴 작성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것 같은데요?

◀기자▶
현재 2·28민주운동 기념탑은 두류공원 안에 있는데요.

기념탑 석판에도 결의문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작성자는 누구인지 6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록이 돼 있지 않습니다.

취재 과정에 상당히 근거 있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고 경북고 하청일 학생으로 특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생활기록부를 봤는데요.

생활기록부에는 하청일 학생을 '2·28 학생의거 선언문 작성자'로 명시하고 있고 '이승만 정부 때 비상한 주목을 관헌으로부터 받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리고 생활기록부에는 굉장히 놀라운 단어 하나가 나왔는데, 3학년 때 교사는 학생의 적성 란에 혁명가라고 기록한 겁니다. 혁명가.


◀앵커▶
그런데, 학교에서도 명백하게 기록한 이런 사실이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있을까요?

◀기자▶
2·28 당시 2월은 3학년 학생은 졸업하고 2학년 위주로 시위에 나섰습니다.

하청일 학생은 원래대로라면 이미 졸업해야 하는 3학년이었는데, 공납금 미납으로 제적 상태였습니다.

그러면서 2학년 학생들과 함께 시위를 할 수 있었고, 문장력이 뛰어나 후배 부탁을 받아 결의문까지 작성했습니다.

2·28 때 경찰에 잡혔던 학생 대부분은 훈방 조치 됐지만 하청일 학생은 제적으로 학생 신분이 아닌 탓에 훈방에서 제외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청일 학생은 이후에 복학하고 졸업도 했습니다만, 47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는데요.

하청일 학생의 동생이자 현재 대구문학관 관장을 맡고 있는 하청호 관장의 말입니다.


◀하청호 대구문학관 관장  경북고 하청일 동생▶
"어머니는 그게 드러나는 걸 원치 않았죠. 왜냐하면 나와 동생이 다 공직에 있었고 지금처럼 2·28이 국가기념일 되고 사회에서도 2·28에 대한 재조명이 되고 이러는데 그전에는 안 그랬거든요.

어두웠던 시대 상황에서 상당히 밝히기가 힘들었던 부분이 있었던 겁니다.

결의문은 역사적 사명감을 담았고 고등학생 수준을 뛰어넘은 것으로 평가받는데요.

결의문 관련해 영남대 철학과 최재목 교수의 말입니다.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대한민국의 역사를 아시아와 세계 역사 속에 편입시켜서 확대해가고 싶은 그런 역사적 사명감 같은 것은 대단히 소중하고 결의문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아닌가?"

2·28이 일어나고 그동안 63년이 지났는데요.

피 끓는 학생들의 정의감에 불을 댕긴, 결의문의 가장 마지막 자리에 있어야 할 작성자의 이름도 이제는 새겨져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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