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대구에서 참 상징적인 공간이죠. 서문시장이 지금 자리에 터를 잡은 지 오는 4월 1일이면 딱 100년이 됩니다.
조선시대 가장 번성했던 향시에서 국내 섬유산업을 이끄는 메카로, 지금은 '대구'하면 떠올리는 대표적인 공간이자 보수 민심의 바로미터로 불리기까지 서문시장이 백 년을 맞았습니다.
지난 한 세기를 손은민 기자와 돌아보겠습니다. 손 기자, 서문시장이 중구 대신동 일대 지금의 자리에 문을 연 게 올해로 100년인데, 사실 역사는 훨씬 더 오래됐다고요?
◀기자▶
네 맞습니다. 서문시장의 역사는 15~16세부터인데요.
조선시대 때 대구읍성을 드나들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면서 읍성 북문 밖에 작은 향시가 형성됐고요.
이게 번성하면서 서문 밖으로 이동했는데 서문 밖의 장, 지금의 서문시장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앵커▶
15세기 내지 16세기라면 100년이 아니라 400년 이상 된 거군요?
◀기자▶
네, 조선 시대, 3대 장시로 불릴 만큼 번성했는데요.
일제강점기 전후에는 국채보상운동과 영남 지역 최초 독립 만세운동이 태동하는 역사적 현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딱 100년 전인 1923년 현재 중구 대신동 일대에 있던 천황당 못을 메우고 지금의 자리에 서문시장이 새로 문을 열게 됩니다.
◀앵커▶
서문시장이 전국을 아우르는 섬유 도소매 시장으로 성장하게 된 건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부터라고요?
◀기자▶
네 맞습니다.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구로 피난민이 몰리면서 인구와 거래가 늘고 서문시장도 덩달아 성장했습니다.
당시 대구 일대에 몰려 있던 직물공업 업체들이 생산한 물건이 풀리면서 서문시장에는 전국 최대 규모의 포목, 주단 도소매 시장이 형성됐습니다.
1950년대에는 대구 15개 시장 총거래액의 40%가 서문시장에서 이뤄졌을 정도였고, 1970년대까지 섬유산업 메카로 지역 경제와 국내 수출까지 견인했습니다.
서문시장을 연구한, 영남대 문화일류학과 정재역 강사 이야기 들어보시죠.
◀정재영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서울 동대문시장 상인들이 서문시장에 와서 섬유 도매를 다 떼어갈 정도였습니다. 광복 이후 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섬유 산업이 활성화될 때 유통을 책임진 곳이 서문시장이었던 거죠. 그러니까 대구 근교에서 생산된 섬유 제품들이 모두 서문시장을 통해서 전국으로 유통되는 그런 구조였던 것으로"
◀앵커▶
지금 서문시장을 보자면, 정치, 특히 선거 때면 주목받는데, 그래서 '보수 정치 1번지'라고 불리기도 하지 않습니까?
◀기자▶
네 맞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대선주자들이 앞다퉈 서문시장을 찾는 걸 보면 알 수 있는데요.
항상 사람들이 많이 모이다 보니 대통령 직선제 개헌 직후인 1987년 노태우 전 대통령부터 지금의 윤석열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지지층 결집이 필요할 때 꼭 서문시장을 찾았습니다.
대구 민심, 보수 민심을 가늠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상징성이 있다 보니 지금은 서문시장 방문 일정만으로도 하나의 정치적 메시지가 되기는 합니다.
◀앵커▶
그런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서문시장인데, 참 많은 위기를 겪기도 했죠?
◀기자▶
100년의 세월 동안 서문시장은 여러 번의 대형 화재로 숱한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담뱃불에서 시작돼 4지구 전체를 집어삼킨 1975년 화마와 2지구를 잿더미로 만든 2005년 사고, 지금까지도 복구되지 못하고 남아 있는 2016년 4지구 화재까지 1950년 이후 기록된 큰 불만 17번입니다.
서문시장은 반복된 화마의 아픔을 딛고, 지역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으로 한 세기 동안 지역민의 삶의 애환을 함께하며 이제 100년을 맞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