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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1]대구 10월항쟁 발생원인과 과제

도건협 기자 입력 2014-10-01 13:19:12 조회수 0

◀ANC▶

오늘은 대구 10월 항쟁 68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중항쟁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아직 진상 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유족과 피해자들의 아픔도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대구문화방송은 오늘부터 대구 10월 사건을
집중조명합니다.

오늘은 먼저 사건의 발생 배경을
박재형 기자가 보도합니다.
◀END▶

◀VCR▶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심각한 식량난에다 콜레라와 수해까지 겹치고
미 군정이 쌀 강제수집과 제한배급 정책을 펴고
보리와 밀 등 여름 곡식 수집까지 강행하자,
대구에는 굶주린 시민들의 시위가
수시로 벌어졌습니다.

9월 말부터는 쌀 배급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벌어졌고
급기야 10월 1일 저녁,
대구역 앞에서 수 천 명의 시위 노동자와
100여 명의 무장경찰대가 대치하던 중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숨지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분노한 시민들이 다음 날 숨진 노동자의 시신을 메고 대구경찰서를 점거해 무기를 탈취했고,
대구역 앞에서 경찰과 시위대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시위대는 부잣집이나 친일파의 집을 털어
식량과 생필품을 시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C.G 1]시위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갑차와 기관총 부대를 동원한 미군에게
진압됐지만,영천과 인근 지역으로 번져 나가
12월 중순까지 전국 73개 시군으로
확산됐습니다.

대구 경북에서만 인구의 4분의 1인 77만 명,
전국에서 230만 명이 시위에 참여해
갑오농민전쟁이나 3·1운동에 버금갈 정도의
대규모 항쟁이었습니다.//

C.G 2]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경북에서만
경찰과 시위대 양쪽에서 170명이 숨지고
180여 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됐지만
보복이 두려워 신고를 꺼렸던 점을 감안하면
희생자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0월 항쟁을 좌익폭동으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미 군정 하에서 식량난과 토지개혁 지연,
친일 관리 중용 등 모순이 지속되자
성난 민심이 폭발한 것이라는 해석에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INT▶ 김일수/계명대 강사
"10월항쟁의 성격-
빼앗긴 해방에 대한 열망 분출"

사태 이후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 단체들의 토벌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까지 계속됐고
재판도 없이 민간인을 처형하는
사적인 보복까지 흔하게 벌어졌습니다.

대구 10월항쟁 관련자들은
1949년 말부터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뒤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도
상당수가 살해됐습니다.

MBC뉴스 박재형 입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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