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구MBC NEWS대구MBC NEWSDESK대구MBC NEWSDESK, TODAY 리포트 대구MBC 사회

민간인 학살 유족 상흔 "이제라도 진실 규명"

◀앵커▶
한국전쟁 전후 자행된 민간인 학살 사건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국가 권력이 적법한 절차 없이 국민의 생명을 앗아간 우리 현대사 최대의 비극입니다.

1기에 이어서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진실 규명 신청을 접수하고 있는데요.

많은 유족이 이미 세상을 떠났고, 살아남은 이들도 오랜 세월 연좌제에 시달렸던 기억 때문에 신청을 꺼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건협 기잡니다.

◀도건협 기자▶
팔순을 바라보는 아들이 위령탑 앞에 섰습니다. 벽에 새겨진 어머니 이름을 보니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최영진▶ /77살, 민간인학살 피해 유족
"엄마 저 왔어요..."

최 씨는 한국전쟁 전후 자행된 민간인 학살로 부모와 2명의 숙부, 큰누나까지 가족 5명을 잃었습니다.

삼촌은 경북대 의대의 전신인 대구의전의 학생회장이었던 최무학씨입니다.

당시 대구지역 학생 운동의 지도자급 인물로 1946년 10월 항쟁 당시 대구경찰서 앞에서 이른바 시신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인타뷰▶ 최영진/민간인 학살 피해 유족
"최무학 삼촌으로 인해 발단이 돼서 도화선에 불을 붙인 장본인이라 해가지고...우리를 모든 사람들이 무슨 빨갱이 자식이라 이런 식으로"

의사였던 아버지 최문학씨는 누명을 쓰고 형무소에 갇힌 뒤 행방불명됐습니다.

경북여고 학생이던 큰누나는 육군 정보국 김창룡에게 붙잡힌 뒤 실종됐습니다.

관동군 헌병 오장 출신으로 친일파의 대명사인 김창룡은 한국전쟁 때 민간인 학살 책임의 핵심 인물입니다.

아버지 옥바라지를 하던 어머니도 한국전쟁 직전 경찰에 끌려간 뒤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단란했던 가정이 한순간에 풍비박산된 것도 모자라, 가족의 비극은 평생을 꼬리표처럼 최 씨를 따라다녔습니다.

◀인터뷰▶ 최영진/민간인학살 피해 유족
"(취직하려고) 호적 등본 내면 빨간 줄이 그어져 있는 부모님들이 다 나옵니다. 그러면 그것만 보고는 그냥 (취직이) 다 안됩니다."

최 씨 가족처럼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 학살사건의 희생자들은 법적인 절차도 없이 군·경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도건협] "4.19 직후에 결성된 전국 피학살자 유족회는 이곳 가창골 등 전국 민간인 학살 사건의 희생자 수가 무려 114만 명에 이른다고 자체 집계했습니다."

하지만 1기 진실화해위에서 진실 규명된 건 만 7천 명 정도에 그쳤습니다. 2기 위원회 출범 후 1기때보다 신청이 늘었고, 내년 12월까지 신청 기간이 많이 남아 있지만 여전히 진실규명 신청을 꺼리는 유족이 적지 않습니다.

◀인터뷰▶ 채영희/10월항쟁유족회장
"워낙 눌려 살았고 연좌제에 걸려 고생을 많이 했고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어떤 정권이 바뀐다 또 세상이 바뀌어져서 언제 우리가 불이익을 당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많다.)"

자발적인 신청에만 의존해서는 진상 규명에 한계가 많습니다.

정부가 공권력의 불법행위가 낳은 참상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해주길 유족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mbc뉴스 도건협입니다.

(영상취재 한보욱)

도건협

추천 뉴스

최신뉴스